"'구름빵' 먹고 자란 모든 독자들에게...선물 같은 전시 되길"

백희나 작가가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전시장에 마련된 '구름빵' 작품 앞에서 웃고 있다. 이솔 기자
무더운 여름밤. 달마저 뚝뚝 녹아흐른다. 마을 반장인 늑대 할머니는 녹아내린 달 물을 모아 시원한 샤베트를 만들어낸다. 세계적 그림책 작가 백희나의 <달 샤베트> 속 한 장면이다.

21일 찾아간 '백희나 그림책전' 입구에선 사람 키만한 늑대 할머니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뒤로는 노란 달이 녹고 있다. 여름밤을 떠올리게 만드는 까만 배경의 입구를 지나면 <구름빵> <알사탕> 등 백 작가의 대표작 속 장면들이 본격적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백희나 그림책전'에 전시된 <달 샤베트> 속 장면.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백 작가는 "전시장 속 점토로 만든 한옥의 나무결, 옹이 등을 표현하느라 전날까지 전시장에서 밤을 새웠다"며 웃었다.백 작가는 2020년 '아동 문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은 국내 대표 그림책 작가다. 이번 전시는 그가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약 20년 만에 여는 첫 대규모 개인전이다. 22일부터 10월 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다.

백 작가는 평소 닥종이, 점토, 천 등으로 작품의 등장인물과 배경을 직접 제작한 뒤 이를 사진으로 찍어 그림책을 만들어왔다. 이번 전시에는 백 작가의 그림책 11권에 등장하는 모형 약 140점이 전시된다.

그는 "환상 같은 이야기가 감동을 주려면 현실적인 디테일이 중요하다"며 "5월부터 매일 전시장으로 출퇴근하며 전시를 준비했다"고 했다."너무 몸이 힘들다보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가 뭐하러 이런 고생을 한다고 했나.' 싶기도 했어요.(웃음) 그치만 전시장에 올 사람들은 결국 제 책을 좋아해줬던 독자들일 텐데, 제 이야기를 가장 재밌고 실감나게 보여줄 방법을 고민해야 했어요. 한 마디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죠."
백희나 작가가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전시장에 마련된 '장수탕 선녀님' 작품 앞에서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솔 기자
전시를 위해 별도로 실물 크기로 재현한 모형들은 마치 책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동네 목욕탕 '장수탕' 속에 사는 선녀를 상상한 <장수탕 선녀님>이 대표적이다.

구슬 발이 늘어진 공중목욕탕 입구에 들어서면 요구르트를 마시며 목욕을 즐기고 있는 거대한 '장수탕 선녀님'을 마주하게 된다. 하늘색 타일로 둘러싸인 목욕탕에선 수증기까지 보글보글 피어오른다.백 작가는 "<꿈에서 맛본 똥파리>는 물 속 올챙이와 개구리의 이야기라 책 작업을 할 때 연못의 색감을 내려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종이에 인쇄를 하면 그 느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며 "이번 전시회에서는 전시장 바닥에 조명을 설치하고 투명한 아크릴판에 그린 그림을 올려 물 속을 바라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키가 작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전시물의 높이를 정했고, 이야기의 정서를 전달할 수 있도록 조명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관람객들이 마치 몸이 모기만해져서 <알사탕> 속 동동이 집에 놀러간 것처럼, <달 샤베트>속 늑대 가족들의 아파트에 찾아간 것처럼 느끼셨으면 해요."(웃음)
'백희나 그림책전'에 전시된 '달 샤베트' 속 아파트 모형. 이솔 기자
그림책에서는 짧게 등장했던 다양한 늑대 가족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아파트 2층 늑대 가족은 사실 제 가족들을 모델로 했어요. 아파트 모형 속 모습처럼 저도 아이들 어릴 때 식탁에 작업물을 늘어놓고 그림책을 만들곤 했거든요. 3층의 늑대는 록가수예요. 그래서 거실에 큰 스피커가 있죠."

백 작가는 그림책을 쓸 때도, 전시회를 준비할 때도 "아이들에게 뭔가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즐거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은 하루종일 학교에서 '~해라' '~하지 마라' 교훈과 가르침을 듣는다"며 "그림책을 읽을 때만이라도 즐거운 순간을 누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구름으로 구운 빵을 먹으면 몸이 두둥실 떠오르고(<구름빵>) 알사탕을 먹으면 온 세상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알사탕>) 기발한 이야기는 어떻게 상상해내는 걸까. 백 작가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느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데, 누구나에게나 아이디어는 찾아온다"며 "중요한 건 그 아이디어를 놓쳐버리지 않도록 잘 기록해두고 계속해서 뒷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구름빵>은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백 작가는 신인 시절인 2003년 그림책 <구름빵>을 출간했는데, 출판사 한솔교육에 2차 콘텐츠까지 모든 저작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썼다. 책이 흥행하며 뮤지컬 등으로 활발하게 재창작됐지만 백 작가는 계약금 850만원과 인센티브 1000만원을 받는 데 그쳤다.

출판사 등을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냈지만 최종 패소했다. "아무래도 창작자들은 셈에 약해요.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 '구름빵' 같은 걸 상상하긴 힘들겠죠. 그래서 창작자들이 최소한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10년 넘게 이어진 법적 분쟁을 설명할 때도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백 작가는 독자들에게 받은 위로를 말하다가 울컥 눈시울을 붉혔다. "제 초창기 작품을 봤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라서 20대가 됐어요. 한창 소송을 할 때 너무 힘들었는데, 소셜미디어로 한 청년이 '제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글을 보내줬어요. 소송은 졌지만, '아, 이거면 됐다. 나는 성공한 작가다.'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감동을 받았어요.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백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고 지지해준 독자들을 위해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구름빵>을 보며 자란, '구름빵'을 먹으며 자란 독자들에게 이번 전시가 또 다른 선물이 되기를 바랄 뿐이에요."전시를 마친 뒤에는 새로운 도전도 계획 중이다. 영상을 활용한 그림책, 이른바 '돌 드라마'다. 백 작가는 "흔히 한 우물을 파는 걸 작가의 노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는 것도 작가의 노력"이라며 바비인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튜브 드라마를 만들어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