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톡 쏜다… 청량감 넘치는 여성 술꾼들의 역사[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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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호쾌하다. 최근 국내 출간된 <걸리 드링크> 표지를 펼치자마자 캔맥주 고리를 막 제낀 듯 탄산감 가득한 문장을 맞닥뜨렸다. “여성과 술에 관한 역사책이 한 권도 없다고 불평하는 나를 향해, 그럼 한 권 써버리라고 말해준 로렌에게.” 속표지 속 헌사가 보여주듯 이 책은 여성과 술에 관한 역사책이다. 소재는 감각적이고, 문장은 시원스럽다. ‘술 마시고 흥청망청 노는 여자들 얘기를 왜 읽어야 하냐’는 오해, 고리타분한 훈수는 이 파티에 낄 자리가 없다. 술을 빚고 만들고 팔고 마신 여성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건 인류사를 바라보는 색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술의 여신 닌카시를 섬겼다. 인류 역사상 자신의 이름을 남긴 최초의 시인 엔헤두안나는 여성인데, 닌카시를 비롯한 신들을 찬양하기 위해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새겼다. 술과 여성의 역사, 신화와 문학은 이런 식으로 어우러진다. 이밖에 와인과 맥주를 빚었던 중세 수녀들, 보드카 제국을 건설한 예카테리나 2세, 금주법 시대에 맹활약한 밀매업자 등 ‘여성 술꾼’들의 이야기는 잘 익은 술처럼 근사하다. 무엇보다 여성 음주의 역사는 금기와 차별, 억압의 역사와 이어진다. 멕시코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술집 주인이 여성 손님들의 출입을 막는 게 합법이었다. 노동집약적인 양조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건 여성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책을 쓰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면서 여성의 음주를 허용하는 문화와 여성의 자유를 허용하는 문화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여성 음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게 되겠지만, 그 음주가 언제 어떤 이유로 금지되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거꾸로 여성들에게는 무료로 술을 제공하며 환영하는 술집도 있지만, 이게 남성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미끼라는 걸 우리는 ‘버닝썬 사건’ 등을 통해 이미 확인했다. 저자는 “한 사회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알고 싶다면 술잔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된다”고 말한다.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떼고 보더라도 읽을 거리가 풍성한 책이다. 술 자체가 워낙에 문제적인 액체이기 때문이다. 인류를 구원하고 또 멸망시켜온 이 발명품은 종교 의식에 사용되던 신성한 물이면서 환락의 상징이다. 적절한 음주는 인생을 풍요롭게 하지만, 음주나 알콜 중독으로 인한 폐단도 끊이지 않는다. 술에 세금을 매기거나 음주를 통제하려는 당국의 노력은 밀주와의 전쟁을 반복해왔다. 이 책은 원서가 2021년 현지에서 출간된 뒤 이듬해 ‘가디언’지에서 ‘역사와 정치’ 분야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는 등 호평을 받았다.
저자는 뉴잉글랜드 출신 시나리오 작가이자 장르영화 제작자 맬러리 오마라. 할리우드 괴물과 잊혀진 여성들에 대한 문화사를 다룬 <더 레이디 프롬 더 블랙 라군(The Lady from the BLACK LAGOON)>으로 본격적으로 출판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술과 여자들에 대한 유명 웹툰 ‘술꾼도시처녀들’을 그린 미깡 작가는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영화처럼 흥미진진한 이 이야기들을 단숨에 읽고는 너무 신이 났다”며 “앞으로 술자리에서 샴페인을, 위스키를, 럼을, 맥주를 마실 때마다 이 술의 역사에 대한 어떤 여성들이 있었는지 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쯤되면 궁금하다. 알코올과 여성을 주제로 수천 년의 역사를 정리한 저자가 꼽은 최고의 술은 뭘까.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을 위한 술은 뭘까. 그 답은 책을 다 읽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디제스티프(식사 후에 디저트처럼 마시는 술)’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