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임윤찬 손길 거친 '하콘'의 피아노, 78년생 뉴욕 스타인웨이

스무살 하콘 기획자 노트

강선애
물건을 오래 쓰는 편이다.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한 내게 친구가 선물해 줬던 고양이가 그려진 컵, 큐빅이 알알이 박힌 보라색 손거울도 내 손에 들어온 지 20년이 됐다. 동그란 휠을 돌려 음악 고르는 재미가 쏠쏠한 아이팟 클래식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손을 타며 색이 짙게 변한 나무나 가죽 소품도 모두 제법 오래된 친구들이다.

하우스콘서트의 피아노도 그런 존재다. 오랜만에 만나는 연주자나 관객에게 ‘옛날 그 피아노 그대로’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하는 이 친구는 2002년 하우스콘서트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동행해 온 하콘의 터줏대감이다. 1978년산이니 나이가 상당한데 2층에서 지하로, 다시 3층과 지하로… 하콘이 공간을 옮길 때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노익장을 발휘해 왔다.이사를 다니며 피아노를 공간에 안착시키는 과정은 상당한 시행착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일단 운반 자체가 쉽지 않다. 공연장처럼 악기 반입구가 있는 것도, 피아노가 넉넉히 들어갈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사람이 직접 옮겨야 했다. 길이 2m74㎝에 무게는 480㎏에 달하는 만큼 장정 대여섯이 달라붙어도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곡소리가 난다. 이를 지켜만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운반하는 분들께 드릴 시원한 얼음물을 손에 움켜쥐고 ‘제발 피아노가 안전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티 내지 않는 것도 꽤 곤혹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하콘의 피아노는 아직 건재하다. 제작된 지 40년이 넘었으니 콘서트용 악기로서는 이미 수명을 다했을지 몰라도 우리는 이 악기를 고치고, 다듬고, 매만지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함부르크 스타인웨이가 주를 이루는 한국에서 뉴욕 스타인웨이는 존재만으로도 독특한 포지션이다. 상아 사용이 중지되기 이전 생산된 것이라 보기 드물게 상아 건반을 가졌다. 무광의 차분한 보디도 하콘과 제법 잘 어울린다. 피아니스트들이 컨트롤하기 까다로웠던 성격은 몇 차례 수리하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며 보다 부드럽게 ‘에이징’ 돼가고 있다. 그러니 아직 우리 피아노는 현재진행형이다.무엇보다 이 오랜 친구는 그동안 외르크 데무스, 김선욱, 손열음, 조성진, 문지영, 박재홍, 임윤찬 등 셀 수 없이 많은 피아니스트의 손길을 거친 하콘의 역사이며 상징이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중3 때부터 최근까지도 이 피아노를 연주했으니 아마도 우리 피아노를 가장 잘 이해하는 연주자일 것이다. 손열음은 피아노를 교체하지 말고 조금씩 수리하며 사용하면 훨씬 좋아질 거라고 조언을 해준 고마운 연주자다. 피아니스트 한동일은 리허설 내내 피아노를 향해 “Lovely!”를 외쳤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의 공연도, 콩쿠르 이전의 조성진이나 임윤찬의 공연도, 2020년에 열린 13시간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릴레이 공연에도, 하콘의 모든 순간에 1978년산 뉴욕 스타인웨이가 있었다.

어느 날 피아노를 닦다가 문득 여기저기 까이고 다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저곳 이사 다니느라 너도 꽤 힘들었구나….” 안쓰러운 마음에 하얗게 속살이 드러난 부분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우리도 언젠가 헤어질 날이 오겠지만 그때까지 누군가에게 ‘옛날 그 피아노’라고 널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때까지 하콘도 잘 부탁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