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지배하는 세상…나무는 인간의 울음을 들을 수 있을까

소심이의 참견
소설덕후 소심이

'지구 끝의 온실' '나인'
모두 기발한 식물 판타지
초록의 강인한 생명력이 빚은
신비롭고 영험한 이야기들
새벽 걷기는 나의 오랜 루틴이다. 특히 요즘은 시원한 아침 바람이 아까울 지경이다. 지금의 초록은 서서히 붉은색에 가까워지고, 한낮의 무더위는 걷는 것에도 적지 않은 용기를 요구하게 될 게다. 아침잠의 유혹을 뒤로하고 하루를 서두르는 이유다. 어느 곳에서나 풀과 나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각자의 속도로 짙어지는 초록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초록이 이렇게까지 다채로웠나 새삼 그 싱그러움에 놀라곤 한다. 온통 초록인 세상을 보면서 어쩌면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식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이 소설은 노출만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먼지 더스트로 한 차례 멸망한 후의 인류의 이야기다. 2129년 더스트생태연구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식물생태학자 아영은 느리지만 멀리까지 뻗어나가는 식물들의 생명력에 매료된다. 그러던 어느 날 폐허 도시 해월에서 덩굴식물 모스바나가 수상할 정도로 빠르게 증식해 문제가 되고 있으며, 알 수 없는 푸른빛까지 목격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린 시절 이웃에 살던 노인의 정원에서 본 풍경을 떠올리고 그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주인공은 모스바나를 채집해 분석하면서 이 식물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수소문하게 되고 더스트시대에 모스바나를 약초로 활용하면서 사람들에게 ‘랑가노의 마녀들’이라고 불려온 아마라, 나오미 자매의 존재를 알게 된다.더스트로 멸망해 버린 세계. 그 속에서 식물의 보호를 받으며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과학도 기술도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SF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만 팬데믹을 경험한 우리에게 곧 닥칠지 모르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구 끝의 온실>만큼이나 기발한 식물판타지가 있으니 천선란 작가의 <나인>. 손톱 끝에서 식물이 자라고 식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소녀의 이야기다. 작가는 “8년 전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아 목 놓아 울다 문득 나무와 들풀이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나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울음을 들었을까 고민도 했다”는 말로 작품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손톱 끝에서 식물이 자라고 식물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하지만 이 이야기의 매력은 신기한 상상력에 머물러 있지 않다. 나인은 식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통해 홀연히 자취를 감춘 ‘박원우 실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식물들의 이야기만으로 이를 증명해낼 수 있을까? 여기에도 변함없이 주인공을 믿고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등장하고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실종된 박원우를 찾게 된다.
<나인>을 읽고 나서 지난해 제주 한달살이를 하면서 찾았던 비 오는 ‘머체왓숲’이 떠올랐다. 물안개와 운무에 휩싸인 숲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들은 조금은 섬뜩하고 신비롭고 영험하게 느껴졌다. 이 숲을 찾아왔던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오롯이 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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