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무렵

[arte] 김연수의 듣는 소설
아버지는 우리 앞에 푸른 잉크로 집의 설계도를 인쇄한 종이를 펼쳤다. 청사진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새집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 은은한 푸른빛은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다. 청사진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때 그 종이와 아버지의 표정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사십 대 후반이었다. 낡고 불편한 옛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붉은 벽돌로 2층 양옥을 짓겠다는 게 아버지의 청사진이었다. 그때가 아버지 인생의 절정기였다. 아직은 젊고 자신만만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집을 짓고 나서 아버지는 바로 늙어버렸다. 내가 배운 인생의 비밀대로라면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갔다고 해야 할까.
새집을 지을 동안, 우리는 집 맞은편의 여인숙에서 지냈다. 둥근 아치 모양의 양철 간판에는 검정색 페인트로 ‘상산여인숙’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치 간판 아래 철문으로 들어가면 수도꼭지가 있는 마당이 나왔다. 왼쪽은 주인 가족이 거주하는 살림집이었다. 객실은 마당을 감싸며 ㄷ자 모양으로 이어졌다. 뒤뜰로 돌아가면 거기에도 객실은 있었다. 그 객실은 장기투숙객들이 묵었다. 집이 없거나, 집을 떠나온 사람들. 어딘가 수상한 뜨내기들.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비가 내리던 어느 오후, 뒷방의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도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남자들은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
“애인이 뭔지는 저도 알아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애인 이야기를 꺼낸 남자가 말했다.
“니가 애인이 뭔지 안다고? 쪼그만한 게. 그게 뭔데?”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잘못 배웠네. 사랑하는 사람만 애인인 건 아니다. 미워하는 사람도 애인이다. 안 그러면 내가 왜 이러겠나?”
놀리듯 그가 말했다.
“사랑 애, 사람 인. 내 말이 맞잖아요!”
내가 한자 뜻풀이를 하자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니가 아직 몰라서 그렇다. 사전에는 그리 나와도 세상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다.” 그 남자는 내게 뱀 잡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뱀은 머리, 이것만 알면 된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뱀은 머리다. 끝이 갈라진 막대기로 머리 부분만 누르면 끝이야.”
한 번도 뱀을 잡아보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나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내게도 언젠가는 뱀 잡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는 꼭 배운 대로 할 것이다. 뱀은 머리, 다른 건 몰라도 된다. 머리만 잡으면 된다.
그렇게 뱀을 잡아 팔면서 그는 한동안 먹고 살았다. 그다음에는 뭘로 먹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애인 문제 말고 그가 걱정하는 걸 본 일은 없었다. 그런 형편과 달리 대학교까지 다녔다고 해서 다들 놀랐다. 그런 사람이 번듯한 직장도 없이 하루벌이로 여인숙에서 지낸다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 남자에게 나는 그 이유를 들었다. 인생의 비밀을 알았기에 대학을 중퇴하고 세상을 떠돌기로 마음먹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내 설명을 들은 아버지는 “비밀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그게 뭔데?”라고 물었다. 그 남자에게 들은 대로 나는 그 비밀을 말했다.
“사는 게 애들 장난 같구만.”
그 비밀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아버지는 회사에 다녔고, 어머니는 가게에서 일했으며, 형과 누나는 중학생이었다. 낮에 여인숙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심심했기에 집 짓는 공사장을 찾아갔다. 일꾼들은 내가 집 주인의 막내아들이라는 걸 알고 잘 대해줬다. 나는 나무 위에 먹줄을 튕기기도 하고 쌓인 모래를 철망에 뿌리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꼭 새참을 챙겨먹었다. 거기서 고추튀김을 처음 먹었다. 맵다며 먹지 말라는데도 괜찮다며 씹어 먹었다. 생각보다 훨씬 매웠다. 나는 급한 대로 막걸리를 마셔야만 했다. 일꾼들은 이제 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나는 공사장을 찾아갔다.
어느 날, 낮인데도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일꾼들과 언성을 높여가며 말다툼을 벌이더니 큰 망치를 들고 와 청사진에 따르면 안방의 벽에 해당하는 곳을 부수기 시작했다. 벽의 내부가 드러났다. 원래대로라면 작고 단단한 일반 벽돌 사이에 스티로폼을 넣고 벽을 올려야만 했는데, 일꾼들은 구멍 세 개가 뚫린 큰 블록 벽돌로 두께만 그럴 듯하게 올려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아버지는 회사를 잠깐 쉰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하지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리니 서둘러야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과연 그럴까 궁금했다. 은근히 나는 하지를 기다리게 됐다.
하지가 지나자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뒤뜰에는 비 맞은 옥잠화들이 짙은 초록빛을 내뿜었다. 마른하늘이 번쩍거릴 때도 있었다. 나는 숫자를 헤아렸다가 천둥소리를 듣고 340을 곱했다. 그러면 얼마나 떨어진 곳에서 번개가 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한둘을 헤아리기도 전에 천둥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기나라 사람을 떠올리고 웃었다. 옛날에 기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다는 ‘기우’ 이야기를 고사성어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세상 이치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비가 그친 다음날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화단의 흙들은 가장자리부터 말라갔다. 다음 비가 언제 내릴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집이 지어진 뒤에도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망치로 벽을 부수던 그 날, 아버지가 회사에서 해고됐다는 사실은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됐다. 어느 틈엔가 사라진 뱀 잡는 남자의 말이 이따금 떠오르곤 했다. 인생의 비밀을 알게 돼 대학을 중퇴하고 세상을 떠돌기로 결심했다던 그 말. 그가 말한 인생의 비밀이란 잘난 척, 있는 척, 척척척 하지 않아도 이미 나는 세상에 잘 났고 여기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우울한 표정으로 어두운 방에 있는 아버지에게, 그때의 그보다 나이가 더 많아진 내가 들려주고 싶은 비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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