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잔인한 정권이라도 무정부 상태보다는 낫다"

카플란의 현명한 정치가

로버트 D. 캐플런 지음
유강은 옮김
미지북스
252쪽|1만6700원
gettyimagebank

<카플란의 현명한 정치가>는 저자의 처절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1980년대에 국제 분쟁 전문기자로 이라크 쿠르드족을 취재했던 토마스 카플란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정부를 지구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정권으로 봤다. 무도한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을 지지했던 저자의 입장은, 그같은 기대가 실현된 이후 방문한 2004년 이라크 팔루자에서 허물어진다. 후세인 정권이 건재하던 1980년대보다 더 잔인하고 절망적인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여기서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가 도출된다. “무정부 상태 1년이 폭정 100년보다 더 나쁘다” “아무리 잔인한 정권이라도 무질서보다는 낫다” 그리고 무질서가 부르는 최악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 특히 미국의 정치 엘리트는 ‘비극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존재하고,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선(善)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악(惡)과도 타협해야 하는 비극 말이다.
분쟁 지역에서 40년간 저널리스트로 일한 카플란은 국내에서는 지정학에 따른 분쟁과 갈등을 다룬 <지리의 복수>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명한 정치가>에서 카플란은 그런 지정학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국가의 위치와 지리에 운명이 좌우된다는 결정론에 개별 정치인의 의사판단과 고뇌에 대한 이해가 합쳐져야 현실 정치와 외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도로 시작해서 셰익스피어로 끝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는 책 전반에 걸쳐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셰익스피어, 허먼 멜빌 등의 비극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카플란은 이들 비극을 통해 자신이 이라크와 발칸 반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마주했던 한계에 대해 말한다.

이같은 한계를 직시하는 비극적 사고의 실종이 야기한 사태로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탈냉전 이후 벌어진 전쟁들을 든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민주주의와 세계화의 진전으로 생각하며 미국은 곳곳에서 벌어진 분쟁에 개입하지만 세계는 한층 무질서해졌다는 것이다. 카플란은 책에서 “많은 실패한 전쟁이 원대한 야심에서 시작돼 깊은 상처로 끝났다”며 “그 야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거대한 힘에 대한 신성한 두려움”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비극적 사고의 연장선에서 카플란은 아무리 폭압적인 체제라 해도 함부로 바꾸려 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북한 이외에 가장 잔인한 정권이었다”면서도 “대안이 없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선’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악’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진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잔인한 독재자였던 스탈린을 지원해 히틀러와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던 것, 소련의 헝가리 자유화 혁명 폭력 진압에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개입을 포기해 세계 평화를 유지했던 것, 문화혁명의 야만에도 중국에 손을 내밀어 동서화해를 열었던 것 등이 사례다. 이는 미래에 예상되는 분쟁에도 적용된다. 카플란은 비극적 사고를 상실한 워싱턴의 엘리트들이 섣불리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선택할까 두려워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김정은 정권이 아무리 야만적이라도 함부로 체제 전복을 시도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대신 질서가 유지되는 가운데 점진적인 상황 변화를 시도하는 조언이다.

국제정치를 주제로했지만 내용은 서양 문학과 현대사가 뒤섞여 전개된다. 그만큼 책의 문법이 생소할 수 있지만 조금만 적응되면 특이하면서도 깊이 있는 독서 경험을 할 수 있다.

핵심어인 비극적 사고는 개개인의 삶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건, 개인이건 “사태가 종종 잘못될 수 있으며 의도치 않은 결과가 자주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카플란은 국가와 개인이 당면한 사안에 대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것을 서슴없이 ‘망상’이라고 단정 지은 뒤, 실제로 존재하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운명에 당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책에서 인용한 소포클레스 비극의 대사처럼 말이다. “우쭐대지 마라. 모름지기 인간사란 하루 아침에 넘어질 수도 있고, 다시 일어설 수도 있나니. 신들은 현명하게 자제하는 이들을 사랑한다.”

노경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