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일상과 무대 경계에 선 예술가들

이문영 원주시향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10여 년 전 아이들이 어릴 때 일이다. 예술의전당 독주회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막바지 연습과 리허설 때문에 집안일을 못 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밀린 설거지부터 시작했다. 독주회에 오셨던 집안 어른들께 차 한 잔 대접하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 일어나는 어른들을 배웅하며 죄송하다고 하니 차마 눈을 못 맞추시는 듯했다.

“아니다. 내가 미안하지. 좀 전까지 드레스 입고 근사하게 연주하던 게 선한데, 허둥지둥 물일 하는 뒷모습 보니 마음도 안 좋고 그래.”무대 위 오케스트라는 18세기 오스트리아로, 20세기 러시아로,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한다. 관객들이 잠깐이나마 우리의 타임머신에 동승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시대 고전에 대한 경외와 찬사의 의미로, 관객들은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며 아무 때나 박수를 치지 않는다.

예술이 평범한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길 바라는 마음은 연주와 감상에 특정 관습을 만들었다. 일상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제대로 정화하기 위해, 예술의 경험이 비일상의 영역에 머무르길 바란다. 그것이 예술이 주는 감동의 핵심이자 고유한 책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오면 빨래 개고 설거지

그러나 예술가들은 다른 행성 사람들이 아니다. 모두 이 땅에 발 딛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올 때마다 재빨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도시의 무질서한 소음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집에 오면 지판과 활을 잡았던 손으로 음식쓰레기를 처리하고 빨래를 갠다. 두 역할 사이의 간극이 서글프기도 하고 부조리하다 느낀다. 그때 직면한 혼란과 자괴감은 노동의 가치와 우열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정체성의 문제다. 당시 젊고 서툴던 나도, 연주를 보러 오셨던 집안 어른도 두 모습의 공존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웠는지 모른다.

시대와 분리된 예술은 무의미

두 가지 삶은 각각 다른 의미로, 그리고 같은 무게로 소중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자투리 시간에 연습하고 있을 때, 막 걸어다니기 시작한 쌍둥이 딸들은 다리에 매달려 칭얼댄다. 상반신이 슈베르트와 대화하는 동시에 하반신은 쌍둥이에게 점령되고 머리는 두 상황을 한꺼번에 처리한다. 이런 난장판과 뒤엉킴은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온전히 음악에 몰두하던 학생은 점차 가정과 직장을 책임지는 생활인이 되어가고, 언제부턴가 비일상과 일상의 중첩과 삐거덕거림은 당연한 일이 됐다. 매일 두 세계를 넘나들며 재빠르게 모드를 전환한다.

따지고 보면 바흐, 모차르트에게도 음악은 직업이었다. 그들은 권력과 자본을 가진 후원자들로부터 생계와 명성을 보장받으며 현실의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음악을 구현했다. 예술이 현실과 철저히 유리된 ‘특별한 것’이라는 낭만적 신화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예술이 주는 비일상적 경험은 일상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 그 둘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 스며든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시대와 분리돼 독불장군처럼 우뚝 선 예술이란 무의미하다.

모든 시대의 음악가는 일상과 비일상, 직업인과 예술가를 넘나들며 역할극을 한다. 그 경계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경험할지는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