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청, 해외진출 원하는 中企와 한인 기업 잇는 가교역할 해야"
입력
수정
지면A32
'오스트리아 재외동포 기업인' 박종범 영산그룹 회장“750만 명의 재외동포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한국은 전 세계에 무역 거점을 두게 되는 셈입니다.”
한국-재외동포 기업인 '윈윈' 필요
750만 교민 네트워크가 한국 무역거점
큰손 한인 기업인, 국내투자 길 터줘야
맨손으로 매출 1조 기업 일군 거상
사업초기 공급처 줄행랑으로 큰 손해
2년반동안 빚상환…현지서 신뢰 구축
동유럽 틈새 공략…아프리카까지 확장
오스트리아에 본사를 둔 한상(韓商) 기업 영산그룹의 박종범 회장은 이달 초 재외동포청 출범에 상기돼 있었다. 박 회장은 연매출이 한때 1조원에 달한 영산그룹을 맨몸으로 일군 1세대 재외동포 기업인이다. 2011년부터 5년간 유럽한인총연합회장을 지냈고, 2015년부터 2년 동안은 국무총리실 재외동포정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박 회장은 25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외동포청 출범은 정부가 재외동포를 적극적,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챙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며 “해외 진출을 원하는 한국 중소기업과 현지 재외동포 기업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국에 투자하길 원하는 ‘큰손’ 재외동포가 쉽게 투자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외동포청 출범을 맞아 박 회장을 한국경제신문 본사에서 만났다.
▷유럽에서 맨손으로 연매출 1조원대 기업을 만드셨습니다.
“1996년 기아자동차 오스트리아 법인장으로 파견됐는데 2년 만에 외환위기가 터져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이 악물고 하면 뭐든 못 하겠느냐’는 생각에 현지에 남기로 했죠. 직원 한 명을 데리고 무역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선진국이어서 파고들 틈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로 건너가 한 달에 2주, 3주씩 있으면서 발품을 판 끝에 현지 제과 업체에 사탕 포장지를 납품하는 일을 따냈습니다. 마침 한국에서는 화학사업이 발전하고 있어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죠. 우크라이나는 당시 한국 기업엔 불모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나름 블루오션이기도 했습니다.”▷사업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업 걱정으로 온몸에 식은땀이 멈추지 않아 수건을 두르고 자기도 했습니다. 사업을 키우다 사탕 포장지 품질에 문제가 생겨 약 165만달러 규모의 손해를 봤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장지 공급처마저 줄행랑쳐 모든 책임이 제게 돌아왔죠. 하지만 도망가지 않고 현지 업체와 담판해 50만달러로 손해배상액을 낮췄고, 2년 반 동안 그 빚을 꼬박 다 갚았습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이었지만 약속을 지키자 현지 업체가 모기업의 다른 사업인 자동차 부문에 연결해줬습니다. 자동차 분야는 제 전문 분야였던 만큼 이후 사업이 급성장하게 됐습니다.”
▷현재 영산그룹의 기업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2008년에는 연매출 1조원대를 기록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이듬해 매출이 10분의 1까지 쪼그라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체코,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등 동유럽에 이어 알제리, 코트디부아르, 말리, 남아프리카공화국,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매출이 많이 회복됐습니다. 올해는 약 5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전북 전주에도 자동차 반제품 생산공장을 설립해 가동하고 있습니다. 플랜트 수출, 자동차 부품 제조 등의 사업을 하고 있고, 20개국에 3500여 명의 직원을 뒀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러시아 공장이 멈춰 있는데, 다시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태극기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재외동포가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외동포는 현지 사회에 동화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경쟁력이 생깁니다. 한국 문화와 현지 문화가 융합했을 때 창의적인 제품과 서비스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재외동포끼리 단합해야 현지 사회 소수자로서 권익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K팝 등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무역에 큰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재외동포청 출범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정부 차원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재외동포를 챙기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재외동포 인구가 750만 명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전까지 재외동포 정책을 총괄한 재외동포재단은 민간 조직이고 규모도 크지 않아 재외동포를 묶어주는 연결고리로서 부족했다고 봅니다. 재외동포청 설립을 통해 재외동포 정책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실행해 나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흩어져 있던 국적, 병무, 해외 이주, 가족관계 등 여러 민원 서비스를 한 번에 처리하게 된다는 점에서 효과가 클 것이라고 봅니다.”
▷재외동포청에 어떤 역할을 기대하십니까.
“체계적인 한글 교육입니다. 최근 재외동포 2, 3세대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옅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어를 못하는 재외동포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현지어를 잘하는 재외동포 2, 3세대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한국어도 잘해야 현지에서 남들이 갖추지 못하는 무기를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도 재외동포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녀야 그 나라와의 외교나 무역에 있어서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국과 재외동포가 ‘윈윈’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세계한인무역협회(OKTA)는 세계 68개국에 143개 지회를 두고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한국은 전 세계에 무역 거점을 두게 되는 셈입니다. 한국의 중소기업은 이 재외동포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손쉽게 해외 진출이나 무역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기업인 입장에서도 세계 어딜 가든지 우리 동포들이 있으니까 쉽게 해외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업가로서 기대하는 점은 무엇입니까.
“많은 재외동포가 해외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을 다시 한국에 투자하고 싶어 합니다. 재외동포 중에는 큰손이 많아 투자 규모가 조(兆) 단위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투자를 돕는 시스템이나 가이드라인이 없고, 심지어 규제도 있기 때문에 투자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또 한국에 183일 이상 체류하면 정부에 해외 자산을 다 신고해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재외동포청이 이런 재외동포 사업가의 어려움을 듣고 소통해나가는 창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문화예술 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한국과 유럽을 잇는 문화예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유럽의 고급 문화예술을 한국에 소개하고 능력 있는 한인 예술가를 지원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현재 유럽에서 한인 차세대 한국어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젊은 한인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의 내한 공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
▷앞으로 재외동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계획입니까.
“재외동포 경제인들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한국 중소기업과의 상생 방안을 찾아 한국과 재외동포 기업인 모두 ‘윈윈’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박종범 회장은 유럽 차부품·플랜트 시장 개척…20개국에 3500명 직원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자동차 부품과 플랜트 시설을 제조·수출하는 글로벌 무역업체 영산그룹 회장이다. 20개국 28개 법인에서 350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올해 예상 매출은 약 5000억원에 달한다. 재외동포에게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럽 시장을 개척해 영산그룹을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오랜 외국 생활에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국무총리실 재외동포정책위원회 위원과 유럽한인총연합회 회장을 지내는 등 재외동포 사회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1957년 광주광역시
△조선대 경영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
△조선대 경영학과 명예박사
△1996~1998년 기아자동차 오스트리아 법인장
△1999년~ 영산그룹 회장
△2011~2016년 제13·14대 유럽한인총연합회 회장
△2016~2021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유럽·중동·아프리카 부의장
△2017년~ 세계한인무역협회 상임이사
맹진규 기자 mae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