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셰익스피어 야외극장에 아디다스 신은 배우가 나타났다!

[arte] 송용진의 Oh! 매지컬 뮤지컬

지붕 없는 야외에 지어진 셰익스피어 공연장
한 배우 부상으로 갑작스럽게 투입된 '액팅 히어로'

형광펜 줄 그어진 대본 읽으며 슬랩스틱 코미디도
시대극 의상 속 아디다스 운동화 신고도 이질감 '제로'

상대 배우들도 그녀의 연기에 집중하며 '상상력'으로 교감
극한의 상황 속 배우들의 상상력과 몰입이 관객에도 전염
최근 뮤지컬 ‘호프’ 공연을 마치고 잠깐 여유가 생겨서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은 이렇게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의 일정으로 준비했지만, 딸아이가 런던에서 꼭 뮤지컬을 보고 싶다고 해서 스위스 일정을 급거 포기하고 런던으로 가는 일정으로 변경했다. 작년 연말 런던에서 뮤지컬을 본 기억이 좋았던 모양이다.

런던에 가기로 하고 나니 나도 공연을 볼 생각에 설렜다.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어떤 공연을 볼지 검색했다. 아이와는 양일에 나누어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위키드’를 보기로 했고, 나는 낮에 홀로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기로 하고 예매했다.간단히 공연 후기를 공유하자면, 레미제라블은 극장과 무대가 생각보다 크지 않아 몰입도가 무척 높았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연기에 더 집중하며 즐길 수 있었다. 위키드는 정말 인기가 많았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두 공연 모두 훌륭했고 아이도 만족한 것 같아 뿌듯했다. 또한 철저하게 백인 위주였던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공연이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이 함께하는 공연으로 변모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레미제라블의 에포닌 역은 아시아계 배우가 연기했고, 위키드의 엘파바, 글린다, 피에로 역은 모두 흑인 배우들이 연기했다. 10여 년 전만해도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공연에서 아시아 배우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일본인 역을 검은 머리 가발을 쓴 백인이 연기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작년과 올해 웨스트엔드에서 본 공연 모두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을 무대에서 볼 수 있었고, 아시아계 배우들이 많아진 것도 눈에 띄었다. 이런 긍정적인 변화에 박수를 보낸다.

사실, 이번 연재에 다른 내용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글로브 극장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면서 내용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위의 뮤지컬들을 보면서 느낀 내용을 더 깊게 다루어도 좋겠지만, 그만큼 이 공연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글로브 극장은 1599년 버비지형제가 런던 템즈강 남쪽 사우스워크에 세운 극장이다. 이후 셰익스피어 극단의 주 공연장으로 셰익스피어의 명작들을 상연해 유명해졌다.1642년 폐쇄된 후, 1997년 원래 극장 자리 부근에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이 17세기 원형대로 재건되었다.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곡인 ‘The Comedy of Errors’(우리나라에서는 ‘실수 연발’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고 있다)였다. 슬랩스틱 코미디의 원류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어릴 때 사고로 헤어진 쌍둥이 형제가 성인이 되어 재회하면서 꼭 닮은 외모로 생긴 오해와 사건들로 인해 웃음을 유발하는 작품이다.
공연을 보는 내내,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에 지붕 없는 야외의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그 시대 사람들과 함께 왁자지껄 떠들고 웃으며 공연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상상이 되었다. 공연 시작 전, 연주자들이 나와 음악을 연주하며 흥을 돋웠다.

이후 공작 역의 배우가 나와 공연에 대해 안내했다. 한 배우가 오전 연습 도중 예기치 못한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불행하게도 언더스터디 배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공연을 멈출 수 없어 급히 한 배우를 섭외해 대본을 보며 공연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액팅 히어로 같은 배우라고 했지만 아무리 대본을 보고 한다고 해도 그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또 대본을 보고 한다면 어떤 형식으로 할지도 무척 궁금해졌다. 한쪽에 서서 대본을 보고 대사만 해줄 것인지, 배우들과 간단한 동선이라도 움직이면서 할 것인지, 의상과 분장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오히려 내가 더 걱정되었다.만약 ‘내게 그런 제안이 온다면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도 해봤다. 공연이 시작하고 잠시 대역 배우가 나오리라는 것도 잊은 채 공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얼마 후, 검은 티셔츠에 검은 바지, 그리고 검은색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은 배우가 커다란 검은 색 파일에 담긴 대본을 들고 등장했다. 대본을 보며 연기를 하기는 했지만, 모든 동선과 몸으로 하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참여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대본에는 색색의 형광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사실 대본을 보며 연기하기가 더 어렵다. 그런데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역할의 정서와 움직임 모두 잘 표현하였다. 대본을 보고는 있었지만, 작은 리액션도 놓치지 않았고, 상대 배우들 역시 그녀의 연기에 더 집중하여 연기하고 있었다. 배우들의 그런 노력 때문인지, 오래된 시대극 의상을 입은 배우들 사이에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은 배우가 섞여 연기를 하는데도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관객들은 더 집중하며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녀가 분장하고 의상을 입었을 때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색다른 즐거움이 더해졌다.

이번 공연을 보면서 연기와 공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연기란, 배우라는 인간이 자기 신체와 정서를 이용해 희곡 속 가상의 인간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현실의 인간이 가상의 인간을 표현해야 하는 연기라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 행동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인간의 행동은 일반적으로 ‘자극-충동-행동’ 순으로 이루어진다. 배가 고프다는 자극이 오면 무언가 먹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나게 되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게 되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을 배우가 연기하기 위해서는 배가 고플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기를 해야 흔히 말하는 진실한 연기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배우가 이런 자극과 충동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상상력’이라는 선행 과정이 필요하다. 배우 훈련의 대부분은 상상력을 통해 자극에 의한 충동을 만들어내고 그 충동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행동이 나오도록 하는 데 있다.

글로브 극장 위의 배우들은 그날 이런 상상력 가득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상대 배우가 대본을 들고 있음에도, 본인이 대본을 보며 연기를 함에도, 상상력을 통해 서로 역할로서 만나고 연기를 하는 모습이었다. 슈퍼 히어로물이나 SF물을 촬영하는 영상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장면이 블루스크린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우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악당들과 전투를 벌이며 액션과 대사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도 배우의 상상력이다. 연출과 스태프들은 배우들이 그런 상상력을 통해 진실한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돕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좋은 연기를 하고 싶은 배우에게 가장 필요한 재료는 상상력일 것이다.

어릴 적 스승으로 모시는 연출님에게 연기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은 짧고 굵게 대답하셨다. “책을 읽어라!”
아마도 상상력을 키우는 좋은 방법의 하나가 독서이기 때문에 이렇게 답을 하신 것 같다. 연기뿐 아니라 모든 예술의 재료는 상상력이다. 그날 글로브 극장은 무대뿐만 아니라 객석도 이런 상상력으로 가득했다. 최소한 내 주변은 그랬던 것 같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배우들의 상상력을 통한 집중이 관객들을 더 극속으로 빠져들게 했고, 관객들 또한 각자의 상상력을 펼치며 공연의 일부로 스며들었다.무대라는 공간은 늘 상상과 은유가 가득한 곳이어야 한다고 믿으며 지금도 공연을 하고 있다. 그 곳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상상하면서 거대한 상상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그 상상의 에너지들이 모여 폭발하는 힘을 지닐 때, 그 공연은 좋은 공연으로 기억된다. 스태프들은 배우와 관객들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무대를 각자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 내고, 그 무대 위를 배우와 관객의 상상력으로 채우며 공연을 완성하는 것이다.

배우의 부상으로 생긴 해프닝이었지만, 먼 이국땅의 배우가 연기와 공연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안타깝게 부상당한 배우의 빠른 쾌유를 빈다. 얼마나 마음 졸이고 있을까? 그날 대본을 들고 공연을 한 배우는 극장 안의 모든 이들에게 가장 큰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공연의 여운을 좀 더 느끼고 싶어 기념품 판매점에서 맥베스의 대사가 적힌 티셔츠를 사고 가족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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