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우연을 필연으로

[arte] 강선애의 스무살 하콘 기획자 노트
요즘 하우스콘서트(하콘) 사무실은 슈베르트의 음악이 매일 끊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듣다가 끝난다 싶으면 금세 또 다른 작품이 선곡되고, 악보를 보며 듣기도, 여러 연주 버전을 찾아 듣기도 한다. 내 손이 자주 가는 작품은 피아노 트리오 2번. 4악장에서 2악장의 마이너 선율이 반복되는 부분이나 마지막 코다에서 조성이 갑자기 바뀌며 환희에 가득 찬 듯 마무리되는 부분이 특히 좋다. 이 곡 저 곡 공부하며 듣다 보니 피아노 소나타 13번 1악장도, 21번의 2악장도 참 아름답다.

1천 곡 이상 작곡했다는 슈베르트의 작품을 나는 그간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걸까.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순간이 귀에 새롭게 들릴 때마다, 슈베르트의 작품을 일목요연하게 엑셀로 정리하고, 삶이 담긴 전기를 읽고, 작품을 하나씩 공부해 나갈 때마다 슈베르트의 음악 세계와 삶을 이제서야 제대로 마주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콘의 ’줄라이 페스티벌‘ 덕분이다.


통장잔고는 0

걱정 없이 음악을 파고들며 페스티벌을 준비할 만큼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이지만 모든 공연이 중단되던 때를 떠올리면 아찔하기만 하다. 2020년 2월에 시작된 팬데믹은 하콘의 많은 것 아니, 거의 모든 것을 옥죄었다. 대학로뿐 아니라 외부에서 이루어지던 많은 공연이 전부 축소되거나 멈추다 보니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통장의 잔고였다. 코로나가 터지고 두 달 만에 잔고의 숫자는 0에 가까워졌고, 다음 달 급여가 나가기 어려운 상태가 됐을 때 비로소 현실이 눈앞에 보였다. 매일 눈에 띄게 줄어드는 잔고를 보며 걱정이 태산인 나와 달리 박창수 선생님은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길이 없는 표정으로 연일 쏟아지는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월급을 반납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선생님께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지령이 떨어졌다.

“다른 건 내가 책임질 테니, 이 시간을 발전의 기회로 삼아라.”

우리는 그 시기 지독하게 달렸다. 매주 월요일마다 공연해 온 대학로 공간의 폐쇄가 결정되면 다른 공간으로 옮겨서라도, 관객 정원을 최소화해서라도 공연의 호흡을 유지했다. 우리가 유지해 온 리듬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일은 그동안 축적해 온 하우스콘서트 영상자료를 다듬어 유튜브에 올리거나 새로운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등 다른 방식으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해 7월, ‘줄라이 페스티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걸고 시작한 하콘의 여름 축제에서 지난 몇 개월간 더듬더듬 배운 공연의 유튜브 생중계를 시작했다.

줄라이 페스티벌의 시작

매년 ‘원먼스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외연을 확장해 오던 하콘의 여름 축제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음악의 씨앗을 넓게 퍼트려 왔던 기존의 흐름과 반대로 한 곳에 집중해 모아야 했다. 마침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었던 시기적 특성은 적절한 주제가 되어주었다. “전곡 연주를 하자.”긴 호흡을 강조해 왔던 하콘에 이만한 기회는 없었다. 우리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10곡), 첼로 소나타 전곡(5곡)과 교향곡 전곡(9곡)의 피아노 포핸즈 버전 공연을 기획했다. 일 년 열두 달에 걸쳐 연주되는 법은 있어도,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베토벤의 숨결을 따라가는 기회는 분명 흔치 않은 것이었다. 피날레에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32곡) 전곡을 하루에 13시간 동안 릴레이로 공연했으니… 그 어디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에 관객들이 보이는 반응은 뜨거웠다.

그 시기, 유튜브 생중계가 베토벤이라는 산을 함께 넘고 있었다. 카메라, 녹음, 생중계 그 어느 것 하나 전문가가 없는 상태에서의 공연 생중계는 맨땅에 헤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이라 미숙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선생님이 늘 강조하셨던 프로의 정신만큼은 우리 안에 살아있었다. 공연마다 카메라를 매만지며 위치를 결정하고, 무겁고 커다란 사다리를 매번 타고 올라가 조명을 떼었다 붙이기를 반복하고, 사운드 모니터를 하며 생중계에 적절한 소리를 찾아나갔다. 공연이 끝나기 무섭게 생중계 모니터링을 하며 부족한 부분을 반영하던 전 스태프들의 노력은 지금도 하콘 유튜브 채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생중계를 시청한 관객들이 보내온 감사의 표현과 함께.


위기를 기회로, 우연을 필연으로

돌이켜보면 하콘은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왔다. 하콘의 시작 자체가 그렇다. 우연히 친구 집에서 첼로 연습 소리를 듣다가 작은 방에서의 울림에 매료되어 훗날의 하우스콘서트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년 전 관객으로 갔다가 스태프로, 매니저로 동행하게 된 나도 어쩌면 우연이 필연이 된 것일지 모른다.

줄라이 페스티벌에는 어려운 시기 속에서 작곡가 시리즈와 생중계를 시작했다는 의미가 우리에게 있다. 2020년 베토벤 이후로 페스티벌의 주제는 브람스(2021), 바르톡(2022)을 거쳐 슈베르트(2023)로 이어지고 있고, 생중계는 그 이후 지금껏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진행되어 왔다. 작곡가 집중탐구에 많은 관객과 연주자들이 보이는 동참, 그리고 플랫폼으로 안착한 하콘 유튜브의 성장은 팬데믹 동안 우리가 보인 노력의 결실이다. 만약 그 시기 잠시라도 멈춰 섰더라면, 무언가 만들어 내보려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위기를 기회로 삼고자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하콘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지금을 발전의 기회로… 그 한마디에 하우스콘서트는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줄라이 페스티벌에 누군가 우연히 한 번 들러주기를,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다시 찾아와 하콘과 인연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인연이 작곡가의 세계를 함께 공부하는 필연적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우리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