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지고 시절은 변해갑니다…연극 ‘벚꽃동산’ 비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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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상우의 아주 사적인 연극일기
안똔체홉학회와 국립극단의 '벚꽃동산'
무대미술과 스케일은 국립극단이 압도적
배우 시너지와 극의 긴장감은 안똔체홉극장 우위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주는 웃음과 감동 매력적
시대의 변화 따라가지 못한 개인의 비극엔 '쓴웃음'
▲안똔체홉극장의 '벚꽃동산'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의 대가 체홉은 셰익스피어와 함께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꼽힌다. 체홉의 희곡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 지금도 늘 어딘가에선 그의 4대 장막극인 ‘세 자매’, ‘벚꽃동산’, ‘바냐 아저씨’, ‘갈매기’ 중 한 작품이 공연되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교 워크샵 작품의 1순위이며, 소설창작 수업에서는 그의 단편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이번에 안똔체홉학회에서는 그 중 ‘벚꽃동산’을 대학로 무대에 올렸다.(번역·연출 전훈)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국립극단도 명동예술극장에서 이 작품을 공연했다. (번역 오종우/연출 김광보)
막이 오르면 5년동안 집을 떠나있던 라넵스카야 부인과 오빠 가예프가 벚꽃동산이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극이 시끌벅적하게 시작된다. 라넵스카야는 거의 빈털터리이지만 여전히 허세만 가득하고 오빠 가예프도 옛날의 영화만 되새긴다. 그들은 과거 좋았던 시절, 특히 벚꽃동산에 새겨져 있는 유년시절의 추억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심각한 재정문제로 벚꽃동산은 곧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다. 그 집안 농노의 자식이었던 로빠힌은 상인으로 성공했는데 그는 라넵스카야에게 벚꽃동산을 개발해 별장으로 임대사업을 하면 빚을 갚고 지속적인 수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라넵스카야와 가예프에게 벚꽃동산을 파헤치고 별장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천박한 일이다.
▲안똔체홉극장의 '벚꽃동산'
나는 두 극장에서의 공연을 모두 봤는데 대학로 안똔체홉극장의 무대는 소극장인만큼 소박하고 간결했고, 명동예술극장에서는 벚꽃동산의 저택을 거대한 스케일로 무대에 설치하고 모든 벽면을 투명 유리로 표현해 자칫 한번에 깨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과 그 안의 인물들의 속마음까지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을 줬다. 무대미술 면에서는 비교하기 힘들만큼 명동 쪽이 압도적이었지만 배우들끼리의 연기가 자아내는 긴장감과 시너지는 안똔체홉극장 쪽이 한층 더 노련해서 보는 재미가 좀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라넵스카야 부인 남명지, 가예프 유태균, 로빠힌 조환, 비쒹 김병춘 등은 이미 여러 번 이 작품을 했던 만큼 마치 그 인물이 되어버린 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줬고 원숙한 강약조절을 통해 작품의 감칠맛을 살렸다. 안똔체홉학회는 체홉의 희곡만 연구하고 공연하는 곳이니 해석의 깊이가 남다르다. 게다가 안똔체홉극장의 공연은 150분, 국립극단 버전은 110분으로 40분의 차이가 있었다.
▲국립극단의 '벚꽃동산'
체홉의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이 ‘벚꽃동산’은 각각의 인물들이 상징하는 바가 명확하다. 라넵스카야와 가에프는 봉건시대의 귀족을 상징한다. 벚꽃동산은 물론 러시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농노의 후예지만 성공한 상인이 된 로빠힌은 신흥계급을 나타내고, 교사이자 대학생인 트로피모프는 지식인을 상징한다. 연극이든 영화든 좋은 작품의 특징은 상징을 염두에 두고 보든 스토리 자체로만 보든 재미있다는 것이다. 체홉 작품 속의 인물들은 누구 한명 뻔한 캐릭터 없이 개성 넘치고 재미있다. 마치 80년대 김운경 작가의 드라마를 보듯 평범한 인물들이 주고 받는 일상 속 모습과 대사에 웃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한다. 같은 동네에 이웃으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캐릭터들의 향연이 체홉 희곡의 매력이다.특히 라넵스카야와 가예프처럼 새 시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거의 향수에만 젖어 사는 이들도 당연히 현실에 존재한다.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개인도 이에 맞춰 발전해야 마땅하거늘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이대로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주문을 외운다. 그래서 벚꽃동산이 넘어가는 경매일에도 파티를 열고 춤을 추는 것이다. 특히 리더의 이러한 방만한 현실 인식은 조직을 망조로 이끈다. 우리나라도 과거 역사의 변곡점에서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리더의 아집이 발전을 가로막은 적이 적지 않았다. 17세기 명나라와 청나라의 달라진 역학관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병자호란을 야기한 인조, 19세기 중국과 일본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때 쇄국정책을 고집해 조선의 근대화를 늦춘 흥선 대원군 등은 눈과 귀를 닫고 마당 앞의 벚나무만 보던 이들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예전보다 더욱 이해가 첨예해지고 복잡해진 시대. 주변국을 보자면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러시아,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중국. 우리는 이들을 무시하고 여전한 냉전논리로써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벚꽃동산이 로빠힌에게 넘어가고 라넵스카야의 식구들은 이른 아침 짐을 싸 기차로 그 곳을 떠난다. 또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모두 떠나간 빈 집에서 늦게 잠에서 깨어난 늙은 하인 피르스가 홀로 남았다. “날 잊은 게로구나.” 피르스의 독백이다. 늙고 병든 그가 혼자 고독하게 소파에 누워 죽어가면서도 주인 가예프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평생 나 아닌 남 또는 직장을 위해 살다가 쓸쓸히 잊혀지는 존재. 슬프도다. 인생은 비극이다. 국립극단의 김광보 연출은 우리 자신이기도 한 피르스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는 피르스 위로 꽃비를 한껏 흩날린다. 개인적으로 이 설정은 다소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한없이 외롭지만 누구를 탓하지도 않고 담담히 사그러지는 안똔체홉극장의 피르스가 더 마음에 들었다.
▲국립극단의 '벚꽃동산'
정색하고 말하자면 개인이든 국가든 생존을 위해서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몸을 맞춰야 한다. 젊은 세대들은 변화에 유연하다. 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가수 윤하는 ‘사건의 지평선’ 이라는 노래에서 심지어 "추억이 떠올라 그리워하더라도 이제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가겠다." 라고 노래한다. ‘사건의 지평선’이란 아예 이 세상의 빛조차 도달할 수 없는 시공간 영역의 경계 너머를 말한다. 이렇게 다른 차원으로까지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결단과 자세가 급변하는 시대에서의 생존을 위해선 필요하다고 본다.
19세기말 러시아는 체홉의 ‘벚꽃동산’처럼 봉건귀족들이 스러지고 로빠힌 같은 부르주아 신흥계급이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로부터 불과 수십년 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며 공산주의 국가로 거듭난다. 물론 세월이 흘러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며 공산주의 역시 붕괴되었고 지금은 또 수많은 로빠힌들의 나라가 되었다. 이런 쳇바퀴를 떠올리면 역시 멀리서 보는 인생은 희극이다. 쓴웃음을 짓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