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조성진은 첫사랑 열병 앓는 쇼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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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발트 앙상블 협연조성진(29)이 마지막 음을 내려치고 손을 들어 올리자 너무나도 큰 박수 소리가 객석에서 쏟아져 나왔다. 절절하면서도 애틋하고, 찬란하면서도 서글픈 음색에 빠져 다들 공연 내내 박수를 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던가 보다.
모차르트 협주곡 9번 '죄놈'선
모든 음 정확히 연주하면서도
맑은 서정·입체감 잘 살려내
첫사랑 향한 절절한 감정 담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강한 타건으로 비극적 정취 표현
유연한 움직임으로 애수 드러내
지난 25일 경기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열린 조성진의 연주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던 쇼팽이었고, 예술혼을 꽃피우던 스물한 살의 모차르트였다.그가 발트 앙상블(체임버 오케스트라)과 함께 들려준 첫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9번 ‘죄놈’이었다. 모차르트가 법적으로 성년이 된 시기에 작곡한 이 곡은 깊은 감정 표현과 거대한 규모 덕분에 모차르트의 첫 번째 걸작으로 불린다.
조성진은 가벼우면서도 명료한 터치와 유려한 손가락 움직임으로 모차르트의 맑은 서정을 펼쳐냈다. 왼손으로는 다정하면서도 묵직한 음색을, 오른손으로는 모차르트다운 깔끔한 트릴과 역동적인 리듬을 엮어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색채가 대화하듯 움직이면서 입체감이 살아났다.
조성진의 연주는 정확하면서도 노련했다. 선율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가운데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게 연주하는 기법)은 놀라울 정도로 명징했고, 강렬한 표현의 순간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조성진이 연주한 두 번째 작품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출판 순서로는 2번이지만, 실제론 쇼팽이 쓴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이다. 낭만주의 시대 피아노 협주곡의 시작을 알리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쇼팽이 첫사랑에 대한 열병을 앓고 있을 때 작곡한 곡이다.
조성진은 시작부터 격렬한 타건으로 단숨에 쇼팽 특유의 비극적인 정취를 소환했다. 그는 건반을 누르는 깊이와 무게, 피아노의 배음과 잔향의 효과를 예민하게 조절하면서 쇼팽의 다채로운 감정선을 살려냈다. 매끄러우면서도 우아한 음색과 건반을 스치는 듯한 섬세한 터치로 짙은 애수를 드러내다가 점차 건반을 내려치는 강도를 높여가며 뜨거운 열정을 쏟아내는 그의 연주는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2악장에선 청아한 색채와 유려하면서도 세밀한 터치로 선율마다 한 겹씩 풍부한 색채를 덧입히면서 쇼팽이 차마 말하지 못한 첫사랑의 애틋한 감정을 완연히 살려냈다. 윤슬처럼 찬란하면서도 아련한 조성진 특유의 음색은 쇼팽의 순수한 감정을 드러내는 데 꿰맞춘 듯 어울렸다. 정교한 손의 움직임으로 선율의 셈여림과 색채에 미묘한 차이를 두면서 쇼팽의 애절한 감정을 속삭이는 그의 연주는 깊은 여운을 자아냈다.3악장에선 역동적인 폴란드 춤곡 마주르카의 맛이 온전히 살아났다. 하나의 선율 안에서 밀도를 달리하며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놀림과 단단한 음색은 쇼팽의 기품과 활기를 동시에 펼쳐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음의 파장을 넓게 펼치면서 공연장을 쩌렁쩌렁 울리다가도 돌연 소리 진동을 줄여 극도의 박진감을 만들어내는 실력은 일품이었다. 강한 집중력으로 선율을 쉼 없이 몰아치면서 장대한 악상을 토해내는 그의 연주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환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조성진은 달랐다. 이날 협연한 발트 앙상블 단원 수가 20여 명에 불과한 것도, 호른과 오보에가 관악기의 전부인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시 조성진.’ 이날 연주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합한 표현이 또 있을까.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