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공연장에 박수가 사라졌다! 대중문화 공연과 제4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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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송한샘의 씨어터 인사이트대학로의 중소규모 뮤지컬 공연장에 박수가 사라진지 오래다. 관객 대부분 숨죽인 채 공연을 보고, 쌓아둔 감정은 커튼콜에서야 기립박수로 쏟아낸다. 코로나 이후로는 커튼콜에서조차 환호성이 사라졌다. 제작자들과 창작자들도 마찬가지다. 박수, 환호가 나오지 않도록 노래나 장면 말미에 음악을 깐 채 이어간다거나,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의 극들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반면, 대극장 뮤지컬에서 “이 노래 부르고 관객이 환호하면, 충분히 즐겼다 다음 신 가”라거나, “여기선 웃겨도 돼”라며 코믹 릴리프(comic relief)를 주문하는 연출의 디렉션은 일반적이다. 물론 전자는 그르고 후자가 맞는다는 것이 아니다. 최근 대학로의 치우친 트렌드에 대해 다 같이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뮤지컬에서 박수와 환호가 반드시 필요한가? 미국 뮤지컬의 자존심이라 불렸던 작곡·작사가 스티븐 손드하임(1930~2021)은 공연 중 단 한순간도 드라마가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고, 적지 않은 작품을 1막 마지막과 커튼콜 정도에서만 박수가 나오도록 설계했다. 유수의 국내 뮤지컬 학과도 그의 지론을 바이블처럼 여긴다. 하지만 난 ‘필요하다’라고 답하고 싶다. 뮤지컬의 본질은 무대, 관객, 배우의 상호 소통에 있기 때문이다.연극과 뮤지컬의 기원은 고대 제사 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의는 원시종합예술이었다. 제주가 신과 소통하기 위해 읊조리던 언어 형태의 축문은, B.C. 10세기 경 노래와 춤으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중은 제주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제의 후에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소통했다. 축문의 표현 수단이었던 언어, 노래, 춤은 B.C. 6세기 그리스 디오니소스 축제의 비극, 한 세기 뒤의 희극으로 계승되었다. 제주의 역할은 한 명에서 세 명의 배우로 계승되었고, 뮤지컬의 앙상블 격인 코러스도 이때부터 등장했다. 축제 기간에는 배우와 관객 모두 함께 여흥을 즐겼으니 비극과 희극의 본질은 소통이었다.
극장의 변천사를 알면 조금 더 분명해진다. B.C. 4세기 그리스의 에피다우로스 극장은 무대 삼면을 객석이 둘러싼 반원형이다.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은 원형 극장 한가운데에 모래를 깔아놓은 아레나 형태였다. 중세 암흑기를 지나 16세기 런던에는 셰익스피어의 글로브 극장처럼 무대 삼면을 땅바닥과 중층의 객석이 둘러싼 반원형 극장이 들어선다. 무대를 객석이 둘러싸면 관객은 배우의 정면은 물론 옆과 뒤, 심지어 건너편 관객의 표정까지 볼 수 있다. 이때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흐려지고 박수, 환호, 야유 등 소통이 용이해진다. 연극이 현실을 재현한 극적 환상이라기 보다 배우와 관객이 함께 하는 제의, 유희에 가깝게 되는 것이다.
17세기 초 이탈리아의 파르네세 극장은 최초의 프로시니엄 극장으로 꼽힌다. 프로시니엄 극장은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탄생한, 인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원근법에 근간을 둔다. (신의 시선이 기준인 중세 프레스코화에는 원근법이 없다.) 이 극장에서는 관객 모두 한 방향으로 프로시니엄 아치라 불리는 사각형 액자 안의 무대를 본다. 관객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유리창 같은 ‘제4의 벽(the fourth wall)’을 투과해 무대 뒤 소실점까지 이어지며, 액자 안 건축물과 작화는 원근법에 의해 제작된다. 3면 객석의 무대와 달리 프로시니엄 아치 안 배우들의 옆, 뒷모습, 기계 장치는 노출되지 않고, 연극이 실제처럼 보이는 극적 환상이 창조되는 것이다. (바보상자라 불렸던 브라운관 TV를 떠올려 보자.)19세기 후반 입센과 체호프를 필두로 운문 아닌 산문 희곡이 보편화하고 일상 언어의 대사와 함께 사실주의 연극 시대가 열린 후 프로시니엄 극장은 그 아성을 굳혔다. 객석에 불이 꺼지고 막이 오르면 무대 위 배우는 관객이란 없다는 듯 사실을 재현하고, 관객은 숨죽이고 무대를 엿본다. 이렇게 제4의 벽은 무대와 객석의 소통을 차단하고, 그 벽은 커튼콜에서 배우들이 무대 끝까지 나와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인사할 때 비로소 깨진다.
정리하면, 고대 그리스 이래 연극은 제4의 벽이 없는 반원형 극장에서 공연되었고, 그 본질은 무대와 객석의 소통이었다. 그런데 극적 환상으로 현실을 재현하려는 사실주의 연극 시대 이후 프로시니엄 극장에서 관객이 제4의 벽 안에 갇힌 배우를 엿보는 양태가 굳어졌다.문제는 바로 여기, 연극 보다 뮤지컬에서 발생한다. 대사 위주의 연극과 달리 뮤지컬은 애초에 사실주의적이지 않다. 뮤지컬에서 배우의 연기는 감정의 크기와 진폭에 따라 대사, 노래, 춤으로 확장된다. 반면 우리는 일상에서 노래하고 춤추지 않는다. 미장센이 아무리 사실적이어도 노래하고 춤추는 배우를 두 시간 반 동안 현실로 착각하고 엿보기란 힘들다. 결국 뮤지컬은 관객이 계속 집중하도록 아리아, 듀엣, 합창, 군무, 코믹 릴리프, 화려한 무대 등으로 제4의 벽을 깨고 에너지를 전달해야 한다. 이때 비로소 관객은 박수와 환호로 극에 동참할 수 있다. 이것은 무대에 대한 호평이자, 극중 인물의 행동과 목표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며, 다른 관객들을 향해 인물과 작품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라이선스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 만큼 중소극장 창작 뮤지컬은 양적 질적 측면 모두 성장했다. 합창, 군무, 화려한 무대 장치도 거의 없이 오늘에 이른 것은, 짧은 우리 뮤지컬의 역사를 감안할 때 진정 경이롭다. 하지만 뮤지컬은 사실주의 연극의 유산에만 기대어 있을 수 없다. 연극과 뮤지컬의 본질은 무대, 관객, 배우의 상호 소통에 있다. 손드하임이 미국의 자랑이었지만, 정작 박수와 환호성이 가장 많이 나오는 무대도 늘 브로드웨이였다. 이제 중소극장에서도 제4의 벽을 허물고 객석과 무대가 서로 소통하는 법에 익숙해져야 할 때다. 이를 통해 쌓은 노하우로 소극장은 중극장, 중극장은 대극장으로 그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오늘의 대학로 창작 뮤지컬이 대극장을 거쳐 뮤지컬의 본고장에 그 위용을 떨칠 그날이 오기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