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에는 '트로이 목마'가 없다

[arte] 구은서의 이유 있는 고전

트로이 전쟁 한복판에는
영광도 영웅도 없다
인간을 위한 서사시
호메로스의
GettyImagesBank.
"네 녀석은 싸움박질밖에 할 줄 모르는구나."아들을 타박하는 아버지의 이름은 '제우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지상과 천상을 주관하는 최고신, 올림푸스산의 우두머리, 그 제우스가 맞아요. 꾸중을 듣는 아들내미는 전쟁의 신 '아레스'고요.

'아버지가 오냐오냐한 탓에 동생(아프로디테)이 자꾸 사고를 쳐서 뒷수습을 한 거다'는 아레스의 항변에 제우스는 '네 놈의 성질머리는 엄마(헤라)를 닮아서 그 모양'이라고 받아칩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속 신들의 말다툼은 지금 봐도 웃음이 납니다. 신들의 집안 싸움이 21세기 서울 어느 아파트의 거실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거든요.기원 전 8세기 무렵 쓰여졌다는 '서양 문학의 기원', 트로이 전쟁을 그린 고전, 24권 1만5693행에 이르는 대서사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용한 책…. <일리아스>를 수식하는 말은 많고 많지만, 어쩐지 고리타분할 것 같다는 오해를 주기 딱 좋죠.

그렇다면 이런 소개는 어떨까요. 세계적 베스트셀러 <파이 이야기>를 쓴 소설가 얀 마텔은 <일리아스>에서 영감을 얻어 쓴 새로운 소설을 내년 발표할 예정입니다. 트로이 전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소설이죠.

얼마 전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석하느라 한국을 찾은 그는 "지루하겠거니, 그래도 한번쯤 읽어봐야지, 하고 <일리아스>를 읽기 시작했는데, 예상과 전혀 달랐다. 굉장히 세련되고 현대적인 작품이었다"고 말했어요.기원 전 전쟁 이야기를 오늘날 읽어도 매력적인 이유는 뭘까요. 마침 40년 만의 새 번역본이 얼마 전 아카넷 출판사에서 나왔으니 800쪽이 넘는 이 책을 함께 펼쳐볼까요.
제목 '일리아스'는 '일리오스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이고, 일리오스는 트로이의 또 다른 이름이에요. 트로이 전쟁 이야기라고 하면 영웅담이나 전투 장면부터 떠올리기 쉽습니다.

<일리아스> 속 전쟁에는 영웅도 영광도 없습니다. 살육의 현장을 마냥 찬양하지 않아요. 이 작품은 10년간 끌어온 트로이 전쟁 막바지 며칠간의 얘기입니다. 병사들은 지쳤고, 그 와중에 역병까지 돌아요. 애초에 신들의 다툼과 내기로 시작된 전쟁. 신들은 전능하지만 우스꽝스럽고, 전쟁은 지지부진합니다.

작품 시작부터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는 '파업' 중이에요. 전리품으로 취한 여자 포로를 빼앗겨 화가 잔뜩 났어요. 결국 그의 벗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출전했다가 트로이 왕자 헥토르의 손에 죽음을 맞습니다.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인 뒤 그를 모욕합니다.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흙먼지를 일으키며 끌고 다녀요.

헥토르의 아버지이자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그 밤, 선물을 들고 홀로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당황해하는 아킬레우스의 손에 입맞추죠. 자기 아들을 죽이고 욕보인 그 손에요. 그는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통곡해요.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장례 기간 동안 전쟁을 멈춥니다. 트로이 사람들이 헥토르의 장례식을 치르는 데서 작품은 끝을 맺습니다.

<일리아스>는 한 마디로 말해 신의 분노로 시작해 인간의 연민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작품의 가장 첫 문장은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 그리고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식을 치르며 바지런히 애쓰고 있었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장면은 <일리아스>에 나오지 않아요. 질투하고 분노하고 토라지는,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 그리고 전쟁과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다양한 태도를 통해 삶을 성찰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 중에서 테르시테스는 '문제적 인간'으로 두고두고 거론되는 등장인물입니다. 마텔도 이 인물에 주목했어요.

그는 "일리오스에서 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못생긴 자"였고 "다리는 휜 데다가 한쪽 발은 절고, 두 어깨마저 휘어 가슴 쪽으로 굽어 있는" 사람이었죠. 테르시테스는 희랍 동맹군 수장 아가멤논을 향해 "우두머리나 되어서 아키아인(희랍인)들의 아들들을 재앙으로 이끌고 가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이 전쟁이 부당하다고 유일하게 직언을 합니다.

오뒷세우스의 황금 지휘봉에 얻어맞고 이야기 속에서 사라진 그는 그러나 후대 철학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어요. 철학자 헤겔은 테르시테스를 평민의 대변자라 봤고, 마르크스와 니체 등이 테르시테스를 높이 평가해 '테르시테스주의'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졌어요.

'장수'가 아닌 '아버지' 헥토르의 모습을 그린 대목도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전쟁이 한창인 어느 밤, 헥토르는 부인 안드로마케가 데려온 갓난아기 아들을 안기 위해 팔을 뻗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쓴 투구에 달린 말총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겁을 먹어요. 그 모습에 헥토르와 안드로마케는 그만 웃음을 터뜨립니다.

헥토르는 자신의 자존심이자 보호막인 투구를 벗어 땅에 내려놓은 뒤 아이를 두 팔로 안아 어르면서 '제 아이가 아비보다 뛰어난 남자가 되도록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기도합니다.

은유의 향연이 고전의 내공을 증명합니다. 예컨대 '전쟁의 여신 아테네가 전투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일리아스>는 이렇게 풀어 전달해요.

"아테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공들여 만든 형형색색의 고운 옷을 아버지의 방바닥에 벗어 던지더니, 구름을 모아들이는 제우스의 옷을 입고는 눈물 어린 전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장을 갖추었다."

고전학자 이준석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의 새 번역은 원전의 표현을 살려 은유의 매력을 배가시킵니다. 친절한 주석은 독자의 이해를 돕죠.

이 교수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지난한 번역 과정에 대한 소회를 밝혔어요. "원고를 마치던 날,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통곡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홀가분한 기쁨이 조금은 있을 줄 알았는데, 애태워 사랑하던 이의 마지막처럼 서럽기만 했다."

한글 기준 800쪽 넘는 엄청난 분량. 그러나 번역자도 독자도 이 작품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운명' '죽음' '명예' '인간' 같은 거대한 단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래서일까요. 마텔뿐 아니라 이 작품을 재해석·재창조하려는 예술가들이 많아요. 소설가 매들린 밀러는 <키르케>와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통해 각각 여성, 아킬레우스의 친구의 목소리로 이 작품을 재구성했습니다. 저자 호메로스의 생애가 베일에 싸인 것도 상상력을 자극했겠죠.'그 어떤 인간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이야기는 그렇게 수세기 동안 살아남아 사랑받는 고전이 됐습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