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지는 RE100 요구…녹색 보호주의에 궁지 몰린 차 부품사

유럽발 녹색 보호무역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모든 제품을 재생에너지로만 생산해 납품해 달라는 요청을 충족하지 못해 계약에 어려움을 겪는 자동차 부품사들이 늘고 있다. 차별적 조치에 대한 방어 전략 수립이 시급해 보인다
[한경ESG] 이슈 브리핑
BMW 미국 스파르탄버그 공장의 생산 라인. 사진=연합AP
BMW와 볼보 등 유럽 완성차업체들이 국내 기업에 재생에너지만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RE100(재생에너지 100%)’을 요구하면서 한국 부품사와 맺은 계약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당장 국내 부품사들은 RE100을 실천할 방도가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다. 녹색보호주의를 앞세운 유럽발(發) RE100의 공습이 시작됐다는 평가다. 신재생에너지 공급 대책을 만들고, 국제표준 전쟁에서 한국의 입장을 관철하는 등 정부 차원의 대응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궁지에 몰린 국내 자동차 부품사

한국경제신문이 한무경 국민의힘 의원에게 의뢰해 코트라(KOTRA)에서 입수한 ‘해외 기업의 RE100 이행 요구 실태 및 피해 현황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기차 섀시와 모터 부품을 제조하는 D사는 최근 스웨덴 볼보로부터 2025년까지 모든 제품을 재생에너지로만 생산해 납품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D사가 이를 충족하지 못했고, 중국 볼보 공장 수출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앞으로 볼보에 납품하기 위해선 재생에너지 도입 실천 방안을 담은 ‘RE100 목표 이행 계획서’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는 점도 부담이다. D사는 자체 공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등 노력 중이지만 역부족이다. D사 관계자는 “2025년까지 재생에너지로만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국내 여건을 감안할 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국내 굴지의 자동차 부품업체인 H사도 최근 BMW로부터 프로젝트 수주 막바지에 앞으로 2~3년 내 양산 제품에 대해 RE100 요청을 받았다. 아직 계약이 최종 무산되지는 않았지만, 2025년까지 RE100을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수심이 가득하다. 회사 관계자는 독일 자동차 제조사 다임러-벤츠도 최근 RE100 이행 등을 담은 별도 납품 기준서에 대한 서명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A사도 BMW로부터 앞으로 ‘RE100 실천’과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갖추지 않을 경우 견적 요청서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다. 지난해 발족한 유럽의 지속가능성위원회(GSSB)는 분야별 ‘지속가능성 표준’을 개발해 회계 장부에 기재하도록 할 전망이다. 이를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이 채택하면 자연스럽게 RE100을 미충족한 부품사는 시장에서 퇴출당할 수밖에 없다.미국 기업도 RE100 요구 강화

이를 두고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녹색보호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럽연합(EU)은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도입해 탄소배출량이 많은 수입품에 이른바 ‘탄소세’를 부과할 계획이다. 미국에서 최종 조립한 전기차에만 보조금 혜택을 주는 등 내용으로 한국 자동차업계에 충격을 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도 환경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ESG 공시기준도 환경 분야가 가장 앞서고 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지난 6월 26일 지속가능성 공시 첫 번째 기준서를 발표했다. 이번에 발표한 일반 요구사항(IFRS S1)과 기후 관련 공시(IFRS S2) 기준서는 기업의 기후 위기 대응 정도를 수치화해 공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IFRS S1은 기업이 단기·중기·장기에 걸쳐 직면한 지속가능성 관련 위험 및 기회에 대한 정보를 투자자에게 제공하도록 했고, IFRS S2는 기후 관련 공시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제품 생산과정에서 기업이 배출한 탄소배출량을 공시하고, RE100·탄소배출권 구매 비용 등 기후 위기 대응 지출도 향후 재무제표에 반영하도록 했다. 그만큼 기업이 부담해야 할 녹색 비용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국내 부품사들이 RE100을 실천하지 못해도 당장 납품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BMW도 RE100 이행을 못할 경우 탄소배출권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유럽은 2021년 1월부터 자동차 기업에 부과되는 탄소세를 2025년까지 톤당 25유로에서 55유로로 단계적으로 인상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는 유럽 자동차 제조사의 비용 부담을 국내 부품사로 전가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대응책 모색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RE100 이행 요구가 선진국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할 수 있다는 점은 더 큰 문제다. 미국 주요 기업도 RE100 요구를 강화하고 있다. 애플은 2030년까지 글로벌 공급망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애플 생태계에 포함된 세계 109개 협력사(SK하이닉스·대상 참여)도 애플의 재생에너지 전환에 동참하고 있다. 델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50% 감축, 2040년까지 RE100 달성 목표를 제시했다. 바이오젠은 전 공급망에 걸쳐 재생에너지 100% 사용 확대 및 협력사 동참을 권장하고 있다. 구글은 협력사와 함께 5GW 규모의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을 구축했고, RE100을 이행하는 데 5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부족한 재생에너지…통상 차원 적극 대응 필요선진국이 주도하는 RE100은 한국 제조업체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제도다. 한국은 지리적 여건상 재생에너지 확대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20% 수준까지 늘릴 계획이지만, RE100을 달성하기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

태양광의 경우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총 525TWh의 발전량이 필요하다. 태양광 이용률을 15%로 가정할 때, 태양광발전 설비 규모만 400GW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 정도 규모의 설비를 갖추려면 39억6000만m2의 면적이 필요한데, 이는 서울시의 6.5배에 달한다. 전 국토를 태양광 설비로 뒤덮어야 한다는 의미다. 태양광 이용 효율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태양광 설비를 이용해 국내 재생에너지를 공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태양광에너지를 에너지저장장치(ESS)에 저장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바람 세기와 풍향이 고르지 않은 지리적 여건을 고려할 때 풍력에너지도 완전한 대안이 되긴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 통상 전문가는 “재생에너지 활용에 유리한 선진국이 RE100을 무역장벽으로 활용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 소지가 크다”며 “정부의 적극적 통상 대응이 필요한데 선제적 노력이 전무한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 “당장 유럽의 차별적 조치에 방어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이지훈 한국경제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