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리처럼 반짝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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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백다흠의 탐나는 책소설이나 영화에서 세상이 망해가는 여러 모습들을 목격하게 된다. 클래식하게는 불기둥이 치솟거나 핵이 떨어져 대형 버섯구름이 피고, 구질구질한 인간의 욕망을 절단하고자 손가락을 튕긴다든지 혹은 별다른 이유 없이 벌써 망해 있다든지 또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들이 우글거린다든지 외계의 침략 등 다양한 이유들로 망했던 거 같다. 창작자들은 언제든 이 흔들리지 않는 현실의 편안함을 쥐고 흔들며 세상이 불시에 망해갈 수 있다고, 행복한 시간들을 한순간에 무로 되돌릴 수 있음을, 뭐든지 부숴버릴 수 있음을 시사했다. 대개 거대한 힘들이 아포칼립스화되는 데 일조하는 바, 그에 비해 인간은 미미한 힘으로 맞서고 운명에 붙들려 물 떠놓고 기도만 하거나 도망치는 것으로 묘사해놓곤 했다. 때론 운 좋게 신이 도와준다든지, 인류의 파멸을 막을 비책을 우연히 알게 된다든지 하는 행운으로 세상의 멸망을 피하거나 막을 수밖에 없었다.해파리가 세상을 망하게 하는 소설을 읽었다. 해파리라니. 처음에 든 생각은 해파리로 세상이 망할 수 있다면 지나가는 길고양이로도, 무심코 쓰레기에 앉은 파리로도 세상은 무너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럼에도 임선우의 단편 〈빛이 나지 않아요〉에서는 변종 해파리로 세상이 망해가는 중이었다. 밤이 되면 해안가에서 푸른빛을 내는 해파리들이 해안가로 몰려온다. 오묘하게 인간을 빨아들이는 빛으로 상대를 유인한 뒤 가까이 온 대상을 촉수로 휘감아 자신과 같은 해파리로 만들어버린다. 누군가는 그런 해파리의 출현에서 세상의 종말을 보고 또 누군가는 삶의 탈출구를 본다. 더불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해파리에서 취업의 기회를 본다. 자의든 타의든 해파리에 연루되어 해파리가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누군가는 바다에 적응 못한 ‘인간해파리’의 잔여물을 치워야만 하고, 또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해파리가 되려는 사람에게 도움이-안락사 기업-필요한 법이니까.해파리의 출현은 삶과 죽음을 양가적으로 만들어놓는다. 세상의 멸망을 이끌면서 동시에 현실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나 해파리가 되어 저 넓고 황홀한 세계, 바다로 유영하고자 한다. 해파리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어준 셈인데, 해파리가 해안으로 오기 전부터 이미 현실은 망해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여기에서의 삶보다 해파리가 되어 바다에 사는 쪽을 택하는 일은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 모두 다 이 현실은 지옥이 아닐 터.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유혹당한 것처럼 이 변종해파리에게 빠져들고 만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게 해파리로 인해 세상이 망해가는 것은 얼추 이해가 빠른 편인데, 망해가는 세상을 모세의 가나안 땅처럼 바라는 쪽은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뭐가 그들을 해파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인가.
임선우, 〈빛이 나지 않아요〉, 《유령의 마음으로》, 민음사, 2022
“빛, 현실에서는 절대 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아름다운 빛이 거기에 있었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저렇게 환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만 있다면, 삶에 미련이 없을 거 같았어요.”
삶과 빛(죽음)을 교환해도 전혀 타격감이 없는, 단 한 번도 빛나본 적 없는 삶을 산 자만이 선택하는 해파리 되기. 누구나 빛을 발하고자 사는 건 아니지만, 타인의 빛남을 통해 나의 칠흑을 인지했을 수는 있는 법이니, 그들을 탓할 수는 없겠다. 해파리처럼 빛나고 싶다는 욕망 또한 현재의 삶을 살고자하는 태도일까 의지일까. 그렇게 희망적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가끔 소설이 희망적으로 읽힐 때가 싫다. 거꾸로 말하면 소설이 절망적으로 읽힐 때가 좋다는 말. 해파리로 인한 세상의 망함보다 망함을 기다렸다는 듯 ‘빛’을 선택하는 사람의 절망감이 좋다는 말쯤 되겠다. 절대 빛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자들의 선택이 당위를 얻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