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리처럼 반짝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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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백다흠의 탐나는 책소설이나 영화에서 세상이 망해가는 여러 모습들을 목격하게 된다. 클래식하게는 불기둥이 치솟거나 핵이 떨어져 대형 버섯구름이 피고, 구질구질한 인간의 욕망을 절단하고자 손가락을 튕긴다든지 혹은 별다른 이유 없이 벌써 망해 있다든지 또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들이 우글거린다든지 외계의 침략 등 다양한 이유들로 망했던 거 같다. 창작자들은 언제든 이 흔들리지 않는 현실의 편안함을 쥐고 흔들며 세상이 불시에 망해갈 수 있다고, 행복한 시간들을 한순간에 무로 되돌릴 수 있음을, 뭐든지 부숴버릴 수 있음을 시사했다. 대개 거대한 힘들이 아포칼립스화되는 데 일조하는 바, 그에 비해 인간은 미미한 힘으로 맞서고 운명에 붙들려 물 떠놓고 기도만 하거나 도망치는 것으로 묘사해놓곤 했다. 때론 운 좋게 신이 도와준다든지, 인류의 파멸을 막을 비책을 우연히 알게 된다든지 하는 행운으로 세상의 멸망을 피하거나 막을 수밖에 없었다.
임선우, 〈빛이 나지 않아요〉, 《유령의 마음으로》, 민음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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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현실에서는 절대 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아름다운 빛이 거기에 있었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저렇게 환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만 있다면, 삶에 미련이 없을 거 같았어요.”
삶과 빛(죽음)을 교환해도 전혀 타격감이 없는, 단 한 번도 빛나본 적 없는 삶을 산 자만이 선택하는 해파리 되기. 누구나 빛을 발하고자 사는 건 아니지만, 타인의 빛남을 통해 나의 칠흑을 인지했을 수는 있는 법이니, 그들을 탓할 수는 없겠다. 해파리처럼 빛나고 싶다는 욕망 또한 현재의 삶을 살고자하는 태도일까 의지일까. 그렇게 희망적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가끔 소설이 희망적으로 읽힐 때가 싫다. 거꾸로 말하면 소설이 절망적으로 읽힐 때가 좋다는 말. 해파리로 인한 세상의 망함보다 망함을 기다렸다는 듯 ‘빛’을 선택하는 사람의 절망감이 좋다는 말쯤 되겠다. 절대 빛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자들의 선택이 당위를 얻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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