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를 고전으로…덜컹대는 기차서 쓴 곡으로 '천재'가 된 거슈인

[오현우의 듣는 사람]

탄생 125주년 조지 거슈인
오페레타만 쓰던 작곡가에서 천재 작곡가로

'재즈의 왕' 폴 화이트먼의 음악회에 초청 받아
5주 만에 완성한 첫 관현악곡 '랩소디 인 블루'
26세에 스타 작곡가로 100만장 넘게 팔린 음반

지휘자 번스타인 "신이 그에게 영감을 준 게 분명하다"
클라리넷이 고음을 길게 뽑아내며 글리산도(여러 음정을 미끄러지듯 연주하는 기법)를 들려준다. 이어 피아니스트가 홀로 화려한 카덴차(무반주 즉흥 연주)를 선보인다. 클라리넷이 들려준 테마를 변주하며 광기 어린 독주를 이어간다. 이윽고 오케스트라가 화음을 강렬하게 뿜어낸다. 1924년 2월 12일 뉴욕 아이올리온 홀에서 조지 거슈윈(1898~1937)의 ‘랩소디 인 블루’의 초연 현장이다.

이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거슈윈의 곡을 듣고 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랐다. 그럴 만도 했다. 앞서 연주된 곡들이 모두 낯선 작품이라서다. ‘재즈의 왕’이라 불렸던 폴 화이트먼은 이날 '현대음악의 실험'이란 주제로 음악회를 개최했다. 당대 클래식 음악가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시류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날고 기는 작곡가도 공연에 참석했다. 꽤 엄숙한 자리였지만 객석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공연장 상태가 문제였다. 공연장 환기시설이 고장나 난방 기구의 열기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유명 작곡가의 작품이 들려도 고개를 떨군 채 조는 관객도 나타났다.

공연 규모도 방대했다. 이날 총 26곡이 연주될 예정이었다. 거슈윈의 순서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관객들의 집중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모두가 지칠 즈음 랩소디 인 블루의 첫 마디가 울려 퍼진 것이다. 객석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관객들은 숨죽이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음악회가 끝난 뒤 26세의 거슈윈은 미국의 스타 작곡가로 떠올랐다. 이 곡은 미국에서 3년간 84회 재연됐고 음반은 100만장 넘게 팔렸다. 하늘 높이 치솟는 클라리넷과 자유분방한 분위기,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가 뒤섞인 곡에 미국인들이 반한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라 불리는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 곡에 대해 “곡 구조가 허술해 보여도 거슈윈은 차이콥스키 이래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썼다. 신이 그에게 영감을 전해 준 것 같다”고 호평했다. 화이트먼의 안목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다. 당시 거슈윈은 1막 길이의 오페레타 등 대중음악만 쓰던 작곡가였다. 클래식과 재즈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화이트먼은 그에게 실험적인 곡을 써달라 요구했다. 재즈와 클래식을 아우르는 관현악곡을 써달라는 것. 거슈윈은 호기롭게 승낙했지만 당혹스러웠다.
랩소디 인 블루를 초연하기 전까지 거슈윈은 관현악곡을 써본 적이 없었다. 화성학을 정식으로 배운 바도 없다. 출판사에 취직한 뒤 악보를 팔기 위해 피아노를 친 게 전부다. 주선율을 피아노로 치면 관현악 화음은 편곡자가 대신 써줄 정도였다.

거슈윈은 초연을 두 달 앞두고도 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화가 난 화이트먼은 신문 기사를 통해 재촉했다. 친구들과 당구를 치던 거슈윈은 ‘뉴욕 트리뷴’에 실린 “조지 거슈윈이 재즈 협주곡을 쓰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놀란 거슈윈은 곧장 보스턴행 열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들리는 마찰음과 덜컹거리는 소리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5주 만에 랩소디 인 블루를 완성했다.
거슈윈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일화다. 하지만 거슈윈은 늘 성장에 목말라했다.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이 콤플렉스였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랩소디 인 블루를 초연한 뒤 모리스 라벨을 만나 스승이 되어달라 요청했다.

하지만 라벨은 거슈윈에게 “당신은 이미 일류 거슈윈인데, 왜 이류 라벨이 되려 하나”라고 반문했다. 최고의 음악 교육자였던 나디아 블랑제에게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클래식을 공부하면 되레 거슈윈만이 선보일 수 있는 재즈 선율이 망가질 것이란 우려에서다.

거장으로부터 인정받은 거슈윈은 승승장구했다. 재즈를 기반으로 클래식의 다양한 장르를 엮어가며 명곡을 쏟아냈다. ‘피아노 협주곡 F장조’, 오페라 ’포기와 배스‘, ’파리의 미국인’, ‘썸머타임’ 등 걸작을 쏟아냈다.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던 그는 악성 뇌종양으로 쓰러졌고 수술을 받던 중 3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거슈윈이 세상을 떠난 지 100여년이 흘렀지만 세계 전역에서 그의 음악이 흘러 나온다. 유나이티드항공은 광고를 제작할 때마다 ‘랩소디 인 블루’를 쓰고, 스타벅스는 매장에서 늘 이 작품을 재생한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의 ‘맨해튼’,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환타지아 2000’에서도 주제곡으로 쓰였다. 미국의 음악사학자 테드 지오이아는 거슈윈을 두고 “의심할 여지 없는 천재다”라며 “랩소디 인 블루를 통해 재즈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거슈윈이 태어난 지 올해로 125년째. 한국에서도 그를 기리는 음악회가 다음 달에 열린다. 재즈 피아니스트 강재훈은 박진교(베이스), 최무현(드럼)과 트리오를 이뤄 오는 7일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음악회 ’거슈윈 송북‘을 선보인다. 거슈윈이 남긴 명곡을 피아노 트리오로 편곡해 들려준다. 오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