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반긴축 아이콘' 치프라스 전 총리, 시리자 당수 사임

총선 참패 책임지고 15년만에 대표직서 내려와…"새 사이클 시작할 때 왔다"
2015년 '채권단 긴축안 거부' 공약으로 집권했으나 반년만에 '백기'
2015∼2019년 그리스 총리를 지낸 알렉시스 치프라스(48) 급진좌파연합(시리자) 대표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15년 만에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로이터, AFP 통신에 따르면 치프라스 대표는 29일(현지시간) 수도 아테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임을 발표하며 "새로운 사이클을 시작할 때가 왔다.

부정적인 선거 결과가 새로운 사이클의 시작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말했다.

치프라스는 새로운 당 대표를 뽑는 선거에 후보로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리자는 지난 25일 실시된 2차 총선에서 17.83%를 득표하는 데 그치며 40.56%를 얻은 중도 우파 성향의 신민주주의당(ND·신민당)에 단독 재집권을 허용했다.

지난달 21일 1차 총선에서는 신민당과 시리자가 각각 40.79%, 20.07%를 득표했는데, 한 달여 만에 격차가 더 벌어진 것이다.

치프라스 대표는 이번 총선에서 그리스 국민들의 생활고를 강조하는 선거 전략을 폈으나 민심은 10여 년 전 국가부도 사태를 겪은 그리스 경제를 극적으로 부활시킨 현 정권을 택했다. 치프라스는 그리스 채무 위기가 고조되던 2015년 1월 국제채권단이 요구하는 긴축을 거부하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역대 최연소 총리에 당선됐다.

채권국들은 그렉시트(Grexit·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까지 언급한 치프라스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고 경계했지만, 수년간의 긴축 정책에 시달렸던 그리스인 국민들은 그를 택했다.

그러나 치프라스는 총리에 취임한 지 겨우 반년 만에 국제채권단에 백기를 들고 더 혹독한 긴축 요구를 담은 3차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였다. '배신의 아이콘'으로 낙인찍힌 치프라스에게 이웃 나라인 마케도니아 국호 변경은 마지막 남은 민심마저 잃게 되는 계기가 됐다.

2018년 치프라스는 이웃 나라 마케도니아의 이름을 북마케도니아로 바꾸는 합의안에 서명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국호가 알렉산더 대왕의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 중심지였던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자,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자부심이 큰 그리스의 역사와 유산을 도용하는 것이라고 여기며 이웃 나라가 마케도니아를 국호로 사용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해 왔다.

그리스 국민 대다수가 반대했음에도 치프라스는 의회의 지지를 끌어내 합의안을 통과시켰고, 이는 치프라스 정권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치프라스는 2019년 총선에서 낙마해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에게 총리직을 넘겨줬고, 올해 총선에서도 미초타키스에게 또다시 무릎을 꿇으며 시리자 대표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아테네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난 치프라스는 고등학생 시절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학교 점거 농성을 주도하는 등 일찍이 강경 좌파 운동에 몸담았다.

국립 아테네 기술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는 전국대학생연합 중앙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학생운동에 앞장섰고 2000년 졸업 후 한때 건축회사에서 일했으나 곧 정계에 투신했다.

30세이던 2006년 지방선거에서 아테네시장에 도전해 득표율 10.5%로 3위를 기록해 정계에 돌풍을 일으켰고 2008년에는 시리자 대표로 선출돼 그리스 사상 최연소 정당 지도자가 됐다.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의 열혈 팬이자 '노타이' 차림을 고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반긴축의 선봉에 서며 한때 그리스 정치의 아이콘이었던 치프라스는 이제는 당 대표직에서 사임하며 정치적 재기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이룬 모든 일이 자랑스럽다"며 "이 어려운 여정에는 타협과 힘든 결정, 상처와 소모가 있었지만, 역사에 흔적을 남긴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