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LL STREET JOURNAL 칼럼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반란은 러시아 역사책의 한 장면 같았다. 한동안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떠올랐다. 외국과의 처참한 전쟁(1차 세계대전) 뒤 일어난 혁명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과 1989년 동유럽 혁명도 생각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4일 대국민 연설에서 “1917년에도 등에 칼을 꽂는 공격이 러시아에서 있었다”고 언급하며 러시아 혁명의 기억을 소환했다.
Gerard Baker WSJ 칼럼니스트
바그너그룹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코앞까지 번개 같은 속도로 진격했다. 바그너그룹 용병들이 고속도로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모습, 모스크바의 경계 강화 상황 등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졌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1941년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이 재현된 것 같았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와는 달리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시기를 잘 탄 듯 보였다.
전모 드러나지 않은 용병 반란
사태가 절정에 가까워지자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오랜 독재가 끝난 것처럼,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상도 나왔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결과적으로 1991년 소련에서 벌어진 실패한 쿠데타처럼 끝났다. 심지어 이번 반란은 채 며칠도 이어지지 못했다. 지도자를 포위해 구금하지도 못했다.러시아에서 최근 일어난 모든 일은 음모론을 자극했다. 서방 고위 관료들조차 이 기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이 모든 게 연출된 건 아닌지 의아해했다. 푸틴 대통령은 ‘거짓 깃발(위장 전술)’의 대가다. 푸틴 대통령의 침착하고 강력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계획이었을까? 그가 외국을 상대로 그러하듯, 자국 안의 적과 맞설 수 있다는 경고였을까?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이 사태의 카메오로 출연해 푸틴 대통령을 영웅으로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가정은 들어맞지 않는다.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에게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처벌하지 않겠다고 한 게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됐을까? 최근 며칠 동안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는 강대국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제국과 같았다.
美의 우크라 지원은 옳은 결정
이번 사태의 본질, 푸틴 대통령 정권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그너그룹의 반란을 통해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비판하는 자들의 오류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에 집중함으로써 중국을 견제할 여력이 줄어든다는 주장도 맞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질수록 러시아의 위신에는 상처가 깊어지고, 러시아와 가까운 중국도 타격을 피하기 어려워진다.지금은 퇴역한 군 고위 인사에 따르면 수년 동안 미군의 핵심 목표는 러시아 탱크, 장갑차 등에 큰 피해를 주는 무기 개발이라고 한다. 지금 미국인의 목숨을 전혀 잃지 않은 채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의 주요 동맹인 러시아를 타격하는 걸 멈출 이유가 있을까? 푸틴 정권의 맨얼굴이 드러난 이상, 우크라이나 지원을 강화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이 글은 영어로 작성된 WSJ 칼럼 ‘The Riddle, Mystery and Enigma of Prigozhin’s Coup Attempt’를 한국경제신문이 번역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