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女변호사 태영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한다. 참지 말고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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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여정의 내 마음을 흔든 그 대사
이태영 변호사 삶 다룬 음악극 '백인당 태영'
여성 '최초'의 변호사로 여성 인권 위해 앞장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한다. 참지 말고 끝까지”이태영 변호사(1914-1998)는 여성차별이 당연했던 그 시절, 그 ‘당연’의 불편부당함을 깨우치는 삶을 온 몸으로 실천했던 인물이다. 그 길은 ‘최초’라는 이름으로 개척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서, 여성최초로 사법고시 합격, 그리고 마침내 여성최초로 변호사가 되어 여성의 인권을 위해 앞장섰다. 그 길이 평탄할 리 없었다. 이화여대 가사과를 졸업한 뒤에 전도유망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정일형과 결혼을 하는데, 그는 곧바로 독립운동에 나서고 감옥에 갇힌다. 태영은 당차게 옥바라지에 나선다. 녹이 슨 가위에 손을 베어 가며 이불을 만들어 행상을 다니는 태영을 사람들은 비웃었다. 여자가 제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더라도 남편 잘못 만나면 저 지경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수군거렸다.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풀려난 정일형은 외무부장관 자리까지 오르게 되고, 자신을 위해 꿈을 포기했던 태영에게 법 공부를 권한다. 남편의 지원 속에서 태영은 1946년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다. 그 때 태영의 나이 서른다섯,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 육아와 법전의 사이에서 고군분투한 태영은 마침내 1952년 사법고시까지 합격한다. 남성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경쟁하고, 모든 자격까지 갖췄건만, 태영이 겪는 여성차별은 지금부터였다. 태영은 끝내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태영이 야당 정치인 정일형의 아내인 것도 못마땅했지만, 여성을 판사로 임용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이 판사라니! 시기 상조요!”
"아들을 낳으면 기뻐하고 딸을 낳으면 눈물을 흘리는가! 나는 딸입니다. 나는 어떡하란 말인가!" 웅변대회에 참가한 7살 소녀 이태영 연사가 두 주먹 불끈 쥐고 외친다. 그 목소리가 자못 절박하다. 1914년 조선총독부 통치하의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태영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예고하는 것처럼. 음악극 <백인당 태영>(5.19~6.18, 우란 2경)은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의 삶을 그린다.
태영은 변호사가 되어 폭력 남편에게 시달리며 매 맞는 여성, 혼외자식을 당당하게 호적에 입적한 남편에게 쫓겨난 억울한 여성들의 사연을 법에 호소했다. 태영의 노력으로 1956년 차별받고 억울한 여성들에게 무료로 도움을 주는 여성법률상담소가 문을 열게 된다. 이 곳은 ‘여성 백인회관’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태영의 이름 앞에 붙은 ‘백인당’은 이런 의미를 담은 호이다. 태영의 뜻에 힘을 보태는 국내 여성 1백명, 해외여성교포 1백명의 후원으로 설립된 백인회관은 호주제 폐지와 가족법 개정에 기여하는 산실이 되었으며, 현재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로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한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많은 공연들이 있지만, <백인당 태영>은 여러 면에서 새로우면서도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룬 작품이다. 평안북도 묘향산 산골소녀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어가는 발자취를 쫓는 일은 소박한 무대와 2인극, 그리고 담백한 음악이라는 형식을 통해 더욱 빛이 난다. 장우성 작가, 이소정 작곡가, 박소영 연출로 이우러지는 창작진들의 고민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태영이라는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 이룬 삶의 성취가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 도운 인생의 조력자를 통해 함께 이루어진 것임을 알리는 극의 구조가 의미를 더한다.
사진출처 = 우란문화재단
태영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공부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 처음으로 변호사의 꿈을 심어준 큰 오빠, 태영을 판사로 임용하기 위해 앞장선 김병로 대법원장,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 정일형까지 태영의 목소리를 듣고 세상을 향해 이끌어준 인물들을 1인 다역으로 연기하면서 극의 몰입감과 재미를 더한다.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태영의 감정이 잘 전달되도록 작곡된 음악극 형식은 대사에 더욱 귀 기울이게 했다. 뮤지컬 배우처럼 완벽한 가창력을 소화하지 않아도, 말하듯이 전달되는 선율 담은 대사들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극의 마지막, 태영의 인생 앞에 놓인 장애물들, 또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금기들을 상징하듯 무대 위 여기저기 가로 놓인 선들을 태영이 가위로 잘라내며 말하는 목소리를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한다. 참지 말고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