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현대·미래 오가는 '시간여행자' 최수열..."현대음악의 끌림 느껴보세요"
입력
수정
6일 예술의전당서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 공연현대음악에 '현대'를 붙인 건 단순히 이 시대에 만든 음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불규칙적이고 파편화된 소리, 난해한 조성이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와 똑 닮아서 붙인 측면도 있다.
"현대음악 매력 알리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래서 현대음악은 인기가 없다. 일반 대중은 물론 클래식 애호가와 연주자조차 외면한다.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야 할 자리를 귀에 거슬리는 소음으로 채우니, 그럴 수 밖에.
지난달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교향악축제에서 지휘자 최수열이 부산시향과 함께 공연 리허설을 하고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하지만 어디를 가나, 이런 '비인기 종목'을 살리는데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부산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 수석 객원지휘자인 최수열(44·사진)도 그런 사람이다.
최근 서울 국립극장에서 만난 최수열은 "이해하기 어렵고 불친절한 현대음악에 일반 관객들이 등을 돌리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현대음악의 매력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 정도로 팬이 되지만, (대중을 현대음악에) 한번 빠뜨리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현대음악을 쉽게 받아들일까를 매일 궁리한다"고 했다.
이런 고민이 낳은 결과물이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최수열의 밤 9시 즈음에'다. 공연명을 라디오 프로그램처럼 말랑말랑하게 지은 것도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통상의 클래식 공연보다 1~2시간 늦은 오후 9시에 연다. 대신 공연 시간을 50분으로 줄였다. 임팩트 있게 관객을 빨아들이기 위해서다."밤 7시30분이나 8시 공연은 일반 직장인들에겐 빠듯한 시간이에요. 회사가 공연장과 멀면 저녁은 건너 뛰어야 하죠. 9시는 여유가 있잖아요. 극장보다 멋진 데이트 장소가 될 수 있죠. 클래식 애호가들에겐 '어려운 과목'(현대음악)을 공부하는 야간 심화과정일테고…. 공연 시간을 인터미션 없이 50분으로 짠 이유요? 중간에 쉬면 관객들이 도망갈지도 모르잖아요(웃음). "
최수열은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현대음악을 알리는데 힘 쏟는 이유를 '음악가로서의 사명'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시대의 음악이 후대에도 남으려면, 먼저 우리 시대에 자주 연주돼야 합니다. 지금이야 너무나도 유명한 말러 교향곡도 130년전에는 세상에 갓 나온 현대음악일 뿐이었죠. 그 시대에 사랑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연주되는 겁니다."
최수열 역시 처음부터 현대음악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무대에 서는 게 귀했던 학창 시절, 작곡과 학생들이 만든 작품을 들고 포디움에 선 게 현대음악과 사랑에 빠진 계기가 됐다. "음악을 억지로 좋아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건 현대음악을 자주 소개해서 관객들이 알게 모르게 빠져들게 하는거죠. 제 전략은 '끼워팔기'입니다. 인기 있는 고전음악에 현대음악을 하나씩 슬쩍 넣는거죠(웃음). 덜 난해하고 쉬운 곡으로요."
꽤 효과가 있었다. 작년 11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연 부산시향 60주년 기념 공연이 그랬다. 진은숙, 슈트라우스 등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만든 프로그램으로 짰는데도 좌석이 거의 다 찼다. 이번 공연도 그동안 보기 힘든 신선한 콘셉트 덕분에 예상보다 티켓이 잘 팔리고 있다고 예술의전당은 설명했다.
최수열은 대중 음악도 사랑한다고 했다.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김동률 노래로 가득찼고, 그의 자동차 라디오 채널은 CBS 음악FM의 '허윤희의 꿈과 음악사이에'다. "제 유년시절을 함께 한 음악은 클래식이 아닌 가요였어요. 1990년대~2000년대 한국 가요….지금도 김동률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는 "모든 음악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다"며 "대중 음악을 들으면서도 클래식과의 공통점을 찾는다"고 했다. "바쁜 세상에 살다보니, 요즘 대중가요에선 전주·후주·간주가 사라졌어요. 과거 발라드에는 센치한 전주와 아련한 '페이드아웃'이 필수였는데 말이죠.(웃음) 요즘, 클래식 공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곡을 잘 안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
가요를 사랑하던 소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 음반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호른에 이끌렸지만 악기를 배우기엔 늦었다고 판단, 한국예술종합학교 지휘과에 입학(1999년)한 뒤 마에스트로의 길을 걸었다.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하나만 파고든 대다수 음악인과 달리 여러 음악을 섭렵한 덕분에 그는 클래식과 현대음악, 국악관현악을 넘나든다. 지난달 30일에는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로봇 지휘자와 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음악으로 과거(클래식)와 현대, 미래를 오간 셈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공연 ‘부재’에서 최수열과 로봇 지휘자 ‘에버(EveR)6’가 공연을 마치고 함께 인사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로봇이 생각보다 동작 구현을 잘해서 놀랐어요. 다만 로봇은 귀가 없고, 호흡도 없습니다. 그래서 소리에 대한 피드백을 주지 못하고, (호흡이 없으니) 같은 박자여도 훨씬 급하게 느껴지죠. 로봇이 지휘자를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무대였습니다."
음악의 저변을 넓히려는 최수열의 시도는 올해도 이어진다. 지난해 롯데콘서트홀 송년음악회에서는 왁킹 댄서 립제이, 탭댄서 오민수, DJ 하임을 조합한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인 그의 머릿속엔 대편성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현대음악 프로젝트가 들어있다.
"저는 언제나 새로운 기획 아이디어를 고민합니다. 기왕 하는 거, 애매한 퓨전보다는 충격적인 실험을 좋아하고요. 최근 SM엔터테인먼트와 서울시향이 협업한 공연도 흥미로웠어요. "이번 공연에는 현대음악의 대표 작곡가 리게티,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해 현재 유럽에서 주목받는 한국 작곡가 신동훈의 작품을 선보인다. "음악 애호가중에는 프로그램을 예습하시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이번 공연엔 그러지 마세요. 빈손으로 와서 그냥 느끼세요.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자극을요."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