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파리서 녹음한 이 앨범, 2분 뒤엔 '쾅쾅' 포탄소리

[arte] 이상민의 세기의 레코딩

반다 란도프스카의 '스카를라티 소나타 앨범'
나치 피해 탈출하기 전, 흔들림 없는 연주 압권

사라질 위기의 하프시코드 지켜낸 연주자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세계 최초 녹음하기도
‘벨르 에포크’라는 말이 있다. 불어로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이 말은, 앞에 불어 정관사 La를 붙여 쓰면 유럽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변신한다. 이때 ‘벨르 에포크’는 대략 19세기 후반에서 1914년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절은 인류의 과학과 문화, 예술이 풍성하게 꽃피던 시기였는데, 영국에서는 최초로 지하철이 건설됐고, 에디슨은 백열전구와 축음기를 발명했다. 카를 벤츠가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했고, 사진기의 발명과 함께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발명했다.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에펠탑이 세워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과학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급변하여, 고전적인 전통을 뒤엎는 혁신적인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했다. 음악계에서도 드뷔시를 필두로 인상주의가 태동했고, 모리스 라벨, 에릭 사티 같은 음악가들이 다양한 음악어법으로 현대음악의 토양을 다지던 때였다.학자마다 벨르 에포크를 규정하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해도, 모두가 동의하는 건 이 벨르 에포크 시대가 종식된 해이다. 애매한 시작과는 달리 ‘아름다웠던 시절’의 끝은 명확히 1914년이다. 시작이 어물쩡하던 시대구분이, 어째서 그 끝은 칼로 무 자르듯이 1914년이라는 말인가? 그건 바로 1914년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였기 때문이다. 과학과 문화가 급성장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시절로 규정한 시대였지만, 사실 이 벨르 에포크가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바로 인류역사에서 끝없이 지속되던 전쟁이 없던 유일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젊은이와 민간인의 목숨이 희생된 뒤에도 해답을 찾지 못한 인류는 또 다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20여년 만에 다시 온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1933년 정권을 거머쥔 히틀러는 인종주의를 내세우며 유대인 척결이라는 그릇된 목표를 가지고 인류를 공포와 비극으로 몰아갔다. 수많은 유대인을 비롯해 그들에 동조하거나 비호한 세력을 무참히 제거해 나갔는데, 정치와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음악가들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독일은 물론 유럽 각지에서 생활하던 수많은 유대계 음악가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럽을 떠나 미국이나 남미로 생사를 건 탈출을 해야만 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아니스트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였던 ‘반다 란도프스카(1879~1969)’ 또한 유대인이었다. 그녀는 1879년 변호사인 아버지와 언어학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신동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불행한 유대인 피아니스트였다.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녀는 21세의 나이에 파리 스콜라 칸토룸 교수로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연주자였다.하지만 무엇보다 큰 그녀의 공로는 피아노에 밀려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던 악기, 하프시코드(쳄발로)를 살려냈다는 점이다. 1903년 그녀는 자신의 리사이틀에서 당시 사라졌던 악기인 하프시코드로 연주회를 개최했는데, 음악학자로도 유명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그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1912년에는 그녀의 설계에 의한 새로운 쳄발로가 ‘플레옐사’에서 선보였고, 이듬해 베를린 국립예술대학교는 쳄발로 클래스를 개강하여 란도프스카를 초대 교수로 초빙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 시민권을 얻고, 파리 외곽에 학교이자 콘서트홀을 설립해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1940년에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녀는 리스본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그녀는 이 사태가 그리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달랑 여행가방만 챙겨 집을 떠났다고 한다. 게슈타포의 체포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던 그녀는 다행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남겨두고 온 수많은 악기와 수천권의 책, 그리고 그녀의 모든 재산이 나치에 의해 약탈당했다. 그녀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무일푼 상태였다고 한다.

피아노의 보급으로 하프시코드가 사라질 운명에 처하자, 란도프스카는 온 정열을 기울여 하프시코드를 되살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녀를 ‘현대 하프시코드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살려낸 건 하프시코드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우리가 ‘피아노의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세계 최초로 레코딩 하기도 했다. 이후 이 곡은 여러 연주자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오늘날 바흐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게 만든 굳건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바흐의 작품들과 함께, 바흐와 동갑내기 작곡가였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500개가 넘는 소나타들도 그녀의 노력으로 인해 빛을 보게 됐다. 스카를라티의 작품번호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랄프 커크트릭 또한 그녀의 제자이기도 했다.그녀가 1940년 파리를 떠나기 직전에 녹음한 ‘스카를라티 소나타 앨범’에는 믿을 수 없는 소음이 음악과 함께 녹음되어 있는데, 그건 놀랍게도 실제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녀가 파리의 한 녹음실에서 스카를라티의 D장조 소나타, 커크패트릭 번호 490번을 연주하는 동안 그녀의 스튜디오 근처에 독일군의 포탄이 떨어졌는데, 그 폭발음이 음악과 함께 고스란히 녹음된 것이다. 편집기술이 발달한 요즘이었다면 아마 그 소리는 지워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시만해도 그런 기술이 없을 때여서 이 포탄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아직까지 음반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란도프스카는 포격소리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박자 하나 놓치지 않고 곡을 끝까지 마무리하는데, 음반을 들어보면 그녀가 얼마나 음악에 집중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곡의 녹음을 마치자마자 파리를 떠나 남쪽으로 피신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쩔 수 없이 이 곡을 감상할 때마다 듣게 되는 레코딩 속 포격소리는 우리에게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과 가까이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상황만 보더라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란도프스카가 평생을 바쳐 살려낸 이 아름다운 레코딩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포탄소리는 들을 때마다 생경하면서도 당황스럽다. 이때의 포격으로 당시 아무도 상처입지 않았기만을 기원해본다.

(이 녹음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을 했고, 파리는 독일군의 수중에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항복 조인식을 열고, 파리에 입성하여 에펠탑 앞에서 저 유명한 사진을 찍게 된다.)
사운드 레코딩 속 포탄 소리
(폭발음은 약 2분 정도가 지난 시점에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