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하게 야하고, 엄청나게 아름다운 라일리

[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
막판까지 다이안 레인을 두고 고민을 했다. 그녀는 58세이고 늙었지만 여전히 섹시하다. 진짜다. 남자라면 누구나 (40대 연하의 남자라면 더욱 더) 그녀에게 대시하고 싶을 만큼 지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수퍼맨 영화 ‘맨 오브 스틸’에서 170㎝의 비교적 큰 키에도 아들 클라크(수퍼맨) 역의 헨리 카빌(185㎝)에게 대롱대롱 매달리는 모습은 쪼글쪼글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안 레인에 대해 쓰는 건 결국 포기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나만이 사랑했던 여배우의 비망록에 올릴 것이다. 다이안 레인은 내 여(자)배우니까. 아무도 쉽게 예상하지 못하는 ‘여배우 열전’의 이번 주인공은 켈리 라일리이다. 이름이 입에 안들어 붙어 있을 것이다. 얼굴을 보고, 영화를 보면 무릎을 칠 것이다. ‘아,이 여자?!’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1977년생, 45세이고 영국 출신의 배우이며 일명 ‘로다주’로 불리는 로버트 다우니 Jr.의 ‘셜록 홈즈’로 유명해졌다.

라일리는 여기서 왓슨(주드 로) 박사의 애인이었다가 아내가 된다. 1880~90년대 후반, 빅토리아 시대의 말기의 꽉 잡아당긴 코르셋을 입은 여인들은 이상하게 퇴폐적이다. 사실은 퇴폐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코르셋인데 그것 때문에 더욱 더 퇴폐적으로 느껴진다. 켈리 라일리는 코르셋이 잘 어울린다. 허리는 매우 가늘고 가슴은 크기 때문이다.
언젠가 중국의 거장 첸 카이거에게 영화란 무엇이냐는 질문(마치 에드워드 할렛 카가 했던 ‘역사란 무엇인가’의 대구어처럼)을 하자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길 가에 한 여자가 서 있다고 칩시다. 당신 같은 사람(?)은 그녀를 ‘숙녀’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여자를 길거리의 여자, 혹은 창녀라고 생각할 겁니다. 영화란 그런 존재지요.하지만 난 첸 카이거의 그 대답을 ‘여자란 무엇인가의 답(동양철학자 김용옥의 동명 책 제목과 대구어처럼)’으로 들었다. 여자는 순식간에 두개의 얼굴을 지녔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켈리 라일리가 딱 그렇다. 그녀는 성녀와 창녀 사이의 이미지를 오간다. 굉장히 아름다운 숙녀인데 한편으로는 살벌하게 야하다.

아마 그것은 그녀가 줄곧 그리는, 짙은 아이 섀도우의 색감 때문일 수 있다. 거기에 눈 주변에 일명 ‘빤짝이’, 그러니까 글리터 펄 섀도우를 뿌린다. 켈리 라일리의 눈 색깔은 회색 빛이 감도는 스카이 블루인데 이런 눈이 그윽하게 바라볼 때와 약에 취해 몽롱한 눈빛이 될 때의 차이는 엄청나지만 동시에 둘 다 빨려 들어갈 만큼 매력적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어리석은) 남자들의 로망인, 낮에는 정숙한 아내, 밤에는 창녀 같은 아내의 전형이 바로 켈리 라일리일 수 있다.

댄젤 워싱턴과 나왔던 ‘플라이트’에서 켈리 라일리는 스튜어디스 역으로 나오는데 그녀는 비행 전날 기장과 마약에 잔뜩 취해 섹스를 하고 출근 시간 직전에 간신히 잠을 깬다. 조막만한 팬티 차림으로 호텔 방을 비틀거리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연기할 수 있는 건 켈리 라일리 같은 여배우 밖에 없다.그녀는 극중에서 결국 약물중독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되는데 포르노 감독인 친구에게 약 살 돈을 꾸러 갔다가 영화 출연 제의를 받는다. 아주 심한 장면에 대한 제안이었는데 그녀는 이때 살짝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다. 이런 망설임 같은 장면 역시 켈리 라일리가 제격이다.

성녀와 윤락녀를 오가는 이미지여서인지 그 중간 벽에 강인함이라는 느낌도 숨어 있다. 켈리 라일리는 미국의 인기 시즌 드라마로, 국내 OTT 티빙의 ‘파라마운트+’에 탑재돼 있는 ‘옐로우 스톤’에서 와이오밍의 대목장주 존 더튼(케빈 코스트너)의 딸 베스 더튼으로 나온다. 시즌 중반 베스는 라이벌 목장의 용병 건달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다. 얼굴이 으깨지고 찢어지면서도 그녀는 격렬하게 반항하는데 그중 한명이 그녀를 강간하려 하자 오히려 여자는 다리를 벌리며 “한번 해 봐. 한번 들어와 봐. 너의 그 쪼그만 걸 넣어 봐”라면서 악을 쓴다.

입에서 피가 넘쳐나면서도 깡패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베스 더튼을 구하기 위해 간신히 달려 온 목장의 우두머리 카우보이인 립 휠러(콜 하우저)는 잔뜩 깨지고 부서진 여자를 총을 맞아 가면서 구해 낸다. 그는 배에 총알을 맞은 채 여자를 안으며 사랑을 고백한다. 악당들에게 맞서 싸우며 꿋꿋하게 저항하던 베스는 그때서야 립의 품 속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시즌 드라마 ‘엘로우 스톤’의 하일라이트 부분이다.‘옐로우 스톤’은 1956년 제임스 딘과 록 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이 나왔던 ‘자이언트’를 코폴라 영화 ‘대부’식으로 확장한 느낌을 준다. 수작이다. 켈리 라일리는 여기서 주역을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켈리 라일리의 출연작은 당대 최고의 미드라 꼽히는 ‘트루 디텍티브’ 시즌2이다. 여기서 켈리 라일리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마피아 두목인 프랭크 세미언(빈스 본)의 아내 조던 세미언으로 나온다. 그녀는 악당인 남편을 사랑한다. 남자도 마피아 이지만 그가 지키려고 하는 건 돈이나 조직이 아니라 자신의 여자이다. 이 비극적인 드라마는 모든 캐릭터가 다 죽는데, 오직 살아 남는 사람은 여형사 애니(레이첼 맥아담스)와 조던 역의 켈리 라일리 뿐이다. 두 여자는 애니가 낳은 아이를 함께 키운다. 둘은 한때 적대적 관계였다. 극중에서 조던은 아이를 가지려 애써 왔다. 그녀는 애니가 낳은 아이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켈리 라일리는 주연은 아니지만 주연만큼 극에 집중하게 만든다. 주연 같은 조연이자 조연 같은 주연이다. 일상에서도 (어리석기 그지없는 나 같은) 남자들은 남자보다 더 현명하고 강인한 여자에게 의지하며 살고 싶어한다. 켈리 라일리가 그런 여자이다. 나이도 (내가 좋아하는) 40대이다. 이래저래 ‘여배우 열전’에 적격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