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어' 사라진 벤처투자, 70% 급감... "3분기 회복될 것"[긱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최근 시리즈C 투자 유치에 성공한 한 패션 플랫폼 회사는 직전 라운드와 비슷한 수준의 기업가치를 평가받았다. 거래액이 80% 이상 증가했고, 앱 다운로드 수도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녹록지 않은 시장 환경이 발목을 잡았다. 이 회사의 직전 투자 라운드는 벤처투자 '혹한기' 진입 직전인 지난해 초였다.

상반기 신규 벤처투자액이 3분의 1토막으로 쪼그라들었다. 대규모 투자금을 조달한 스타트업은 눈에 띄게 줄었다. 자금 조달에 나선 스타트업들은 눈을 낮췄고, '벤처 대출'과 같은 우회로를 찾거나 이마저도 어려운 경우 공격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생존'에 방점을 찍었다. 투자자들은 성장에 몰두하던 플랫폼 회사 대신 기술력을 보유해 수익을 실현할 수 있는 회사들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72% 감소한 벤처투자

스타트업 투자정보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 상반기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투자 유치액은 2조8190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9조9994억원)보다 72% 급감한 것으로 집계됐다. 투자 건수로 봐도 올 상반기 이뤄진 신규 투자는 547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177건)보다 절반 이상 줄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상반기 공식 통계는 통상 7월 말께 발표된다. 이미 1분기까지의 수치가 전년 동기보다 60% 넘게 감소해 상반기 전체로 봐도 감소세를 피할 수 없을 것이 확실시된다.

시장 혹한기 초반이던 지난해 상반기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던 초기 단계 스타트업들도 올해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올 상반기 이뤄진 시드(초기)부터 시리즈A 단계 투자는 44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2% 감소했다. 건당 투자액 역시 29.3억원에서 25.2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중·후기투자는 감소폭이 더 컸다. 시리즈B 이후 투자액은 지난해 상반기보다 76%나 줄었다.

벤처투자 시장에 '대어'가 사라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상반기 100억원 이상의 투자 라운드는 74건으로 지난해 상반기(235건)보다 70% 가까이 감소했다. 전체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 상반기엔 20%였지만 올해는 13% 수준에 그쳤다. 지난해 상반기엔 버킷플레이스(2350억원)를 필두로 쏘카(1832억원), 스마트스코어(1800억원), 크래프트테크놀로지스(1746억원) 등 1000억원 이상 대규모 투자를 유치한 사례가 대거 등장했다. 하지만 올해는 비욘드뮤직(2000억원)과 컬리(1000억원) 정도가 눈에 띈 대규모 자금 조달 사례였다. '대어 실종'은 세계적인 추세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지난 1분기 '메가 라운드(조달액 1억달러 이상 투자)' 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0% 쪼그라들었다. 한 VC 심사역은 "출자자(LP)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운용사들 역시 지난해보다 더 보수적으로 투자를 결정하려는 분위기"라며 "대규모 펀드 결성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대형 투자 라운드에 쉽게 들어갈 수 없다"고 귀띔했다.

바이오, 커머스 추락... 소부장, 콘텐츠 주목

상황이 이렇다 보니 투자자들은 스타트업들에 더 깐깐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출혈 경쟁으로 덩치 불리기에 급급해 수익성이 떨어지는 플랫폼 회사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큰 바이오 분야의 투자 감소폭이 두드러졌다. 지난해 상반기 바이오·의료 분야 투자액은 2조2179억원이었지만 올해는 4395억원으로 80% 줄었다. 투자 건수 역시 70% 감소했다. e커머스 업종 투자액 역시 70% 가까이 떨어졌다.반면 제조 기술을 보유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 스타트업은 혹한기 속에서도 선방했다는 평가다. 반도체·디스플레이·3D 프린터 등의 분야에 대한 투자는 29건으로 38% 정도 줄었지만, 투자액은 약 6845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오히려 15%가량 늘었다. 대표적으로 반도체 디자인 플랫폼 회사 세미파이브는 시리즈B 투자 라운드에서 675억원을 조달했다. 또 시스템반도체 컨트롤러를 만드는 파두는 지난 2월 120억원의 투자를 받았다. 기업공개(IPO)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그밖에 K콘텐츠 열풍을 타고 영화, 드라마, 음악 관련 스타트업도 견조한 모습을 보였다. 이 분야엔 지난해 상반기 3339억원이 몰렸는데, 올 상반기엔 2529억원의 자금이 흘러들어갔다. 음원 유통 플랫폼 비욘드뮤직컴퍼니는 2000억원의 '잭팟'을 터뜨렸고, 시각특수효과(VFX) 회사 포스크리에이티브는 250억원을 조달했다. 또 '연플리' 등으로 유명한 웹콘텐츠 제작사 플레이리스트는 알토스벤처스 등으로부터 142억원을 투자받았다.

VC업계 관계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가 커지면서 전반적으로 이 분야에 반영된 긍정적 전망이 스타트업에도 고스란히 연결되고 있는 것"이라며 "또 K콘텐츠 경쟁력을 바탕으로 e커머스 같은 다른 업종에도 콘텐츠가 접목되는 등 확장성이 뚜렷해 콘텐츠 분야의 연평균성장률(CAGR)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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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 활성화 필요... 하반기 점차 회복"

불어닥친 추위가 1년 넘게 지속되자 투자자들은 엑시트(투자금 회수) 방안 마련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IPO 시장이 덩달아 침체됐기 때문이다. 한국은 해외에 비해 회수 시장이 IPO에 치우쳐져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반면 미국은 스타트업·중소기업의 인수합병(M&A)이 활발하다. 올 상반기 국내 스타트업의 M&A는 59건 이뤄졌다. 지난해 같은 기간(99건) 대비 40% 줄어든 수치다.

VC들은 중간 회수의 목적으로 세컨더리 펀드 시장으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세컨더리 펀드는 기존 벤처펀드의 구주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투자가 이뤄진다. 저렴한 가격에 스타트업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DSC인베스트먼트와 소프트뱅크벤처스 같은 대형 VC들은 잇따라 세컨더리 전용 펀드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 또 정부는 세컨더리 펀드 규모를 기존 5000억원에서 1조5000억원으로 3배 늘리기로 했다. 모태펀드는 10년 만에 세컨더리펀드 출자사업을 부활시켰다.

투자자들은 하반기부터는 투자심리가 점차 회복될 것으로 내다봤다. 최근 들어서는 신규 투자가 늘어나며 훈풍이 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월별 신규 투자는 4월 82건, 5월 87건, 6월 105건 등으로 우상향 중이다. 또 7월 들어 에바(220억원), 긴트(165억원), 인테이크(80억원) 등 시리즈B 투자를 유치한 스타트업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상반기에는 워낙 급락이 심했던 시기라 투자자들이 의도적으로 관망세를 유지한 경향이 있지만, 3분기부터는 2021~2022년 조성된 펀드를 통한 투자가 직접적으로 이뤄질 예정인 데다가 기저효과도 나타나 활발한 투자가 집행될 것"이라며 "한국은 반도체처럼 확실한 경쟁력이 있는 섹터를 갖고 있고, 리스크에 휩싸인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나라라는 인식도 있는 덕분에 다른 나라보다 회복세가 빠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