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선 왜 잘못을 빌고 싶을까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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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왕산에 가보셨나요
용평 발왕산 꼭대기
부챗살 같은 숲 굽어보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더니
전망대 이층 식당 벽을
여기 누구 왔다 간다, 하고
빼곡히 메운 이름들 중에
통 잊을 수 없는 글귀 하나.‘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하, 녀석 어떻게 눈치챘을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다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걸.
* 고두현(1963~) : 시인
-------------------용평 숲에서 사흘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나무의 입김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감미로운 추억이 밀려왔지요.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오솔길은 책갈피 속의 행간처럼 아늑했습니다. 낙엽송이 군락을 이룬 능선의 공기는 또 얼마나 싱그럽던지요.
그곳에 머문 지 이틀째 되는 날, 뒷집 아저씨처럼 마음씨 좋게 생긴 발왕산에 올랐습니다. 정상에 도착했더니 전망대 안 식당 벽에 수백 장의 편지가 매달려 있더군요. 아무개 왔다 간다, 하는 메모부터 가족의 건강과 성공을 기원하는 문구까지 온갖 ‘말씀’들이 사방 벽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쾌한 감동을 준 건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녀석의 ‘고해’였습니다.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비록 맞춤법은 틀리지만, 제게는 가장 진솔한 마음의 표현으로 다가왔습니다. 녀석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높은 곳에 오르면 누구나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것을.
산에서는 모두가 겸손해집니다. 자연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기 때문이겠지요. 얼굴도 모르는 그 개구쟁이의 글귀가 그래서 더욱 살갑게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찬물에 세수하고 난 뒤의 청량감처럼 산에서 얻은 뜻밖의 깨우침이었습니다.
그날 밤 발왕산 이마에 걸린 달은 유난히 커 보였지요. 같은 달도 보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늘 거기 있는 산이지만 그 품에 들어 자신을 비춰보면 마음이 달라지고, 큰 잘못이 없더라도 막연히 사죄하고 싶어지는 이치와 닮았죠.달은 하늘 높이 떠 있을 때보다 지평선 가까이에 있을 때 더 커 보인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달 착시’라고 부르는 현상이지요. ‘멀리 있는 것은 작아 보인다’는 통념을 보완하려는 작용으로 달이 실제보다 커 보이는 착시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제가 발왕산에서 본 그날 밤의 달도 그랬을까요. 그것은 단순한 착시가 아니었습니다. 낮에 전망대에서 본 꼬마 녀석의 ‘고해성사’가 뇌보다 가슴에서 우러났던 것처럼 산꼭대기의 그 달은 어떤 광학계로도 측량할 수 없는 제 속의 ‘둥근 거울’이었습니다. 달의 반사경이 비추는 제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지요.
육체적인 ‘뇌의 인식작용’은 종종 착시현상을 초래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성작용’은 우리 영혼의 촉수를 움직이게 합니다. 세상의 높낮이와 내면의 크기를 스스로 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죠.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달은 저를 따라왔습니다. 그 달의 뒷면으로 높은 데 올라 잘못을 비는 아이의 얼굴과 세속도시에서 자주 착시에 빠지는 제 얼굴이 함께 겹쳤습니다. 오, 여행지에서 발견한 달의 두 표정이라니!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용평 발왕산 꼭대기
부챗살 같은 숲 굽어보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더니
전망대 이층 식당 벽을
여기 누구 왔다 간다, 하고
빼곡히 메운 이름들 중에
통 잊을 수 없는 글귀 하나.‘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하, 녀석 어떻게 눈치챘을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다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걸.
* 고두현(1963~) : 시인
-------------------용평 숲에서 사흘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나무의 입김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감미로운 추억이 밀려왔지요.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오솔길은 책갈피 속의 행간처럼 아늑했습니다. 낙엽송이 군락을 이룬 능선의 공기는 또 얼마나 싱그럽던지요.
그곳에 머문 지 이틀째 되는 날, 뒷집 아저씨처럼 마음씨 좋게 생긴 발왕산에 올랐습니다. 정상에 도착했더니 전망대 안 식당 벽에 수백 장의 편지가 매달려 있더군요. 아무개 왔다 간다, 하는 메모부터 가족의 건강과 성공을 기원하는 문구까지 온갖 ‘말씀’들이 사방 벽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쾌한 감동을 준 건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녀석의 ‘고해’였습니다.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비록 맞춤법은 틀리지만, 제게는 가장 진솔한 마음의 표현으로 다가왔습니다. 녀석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높은 곳에 오르면 누구나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것을.
산에서는 모두가 겸손해집니다. 자연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기 때문이겠지요. 얼굴도 모르는 그 개구쟁이의 글귀가 그래서 더욱 살갑게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찬물에 세수하고 난 뒤의 청량감처럼 산에서 얻은 뜻밖의 깨우침이었습니다.
그날 밤 발왕산 이마에 걸린 달은 유난히 커 보였지요. 같은 달도 보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늘 거기 있는 산이지만 그 품에 들어 자신을 비춰보면 마음이 달라지고, 큰 잘못이 없더라도 막연히 사죄하고 싶어지는 이치와 닮았죠.달은 하늘 높이 떠 있을 때보다 지평선 가까이에 있을 때 더 커 보인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달 착시’라고 부르는 현상이지요. ‘멀리 있는 것은 작아 보인다’는 통념을 보완하려는 작용으로 달이 실제보다 커 보이는 착시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제가 발왕산에서 본 그날 밤의 달도 그랬을까요. 그것은 단순한 착시가 아니었습니다. 낮에 전망대에서 본 꼬마 녀석의 ‘고해성사’가 뇌보다 가슴에서 우러났던 것처럼 산꼭대기의 그 달은 어떤 광학계로도 측량할 수 없는 제 속의 ‘둥근 거울’이었습니다. 달의 반사경이 비추는 제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지요.
육체적인 ‘뇌의 인식작용’은 종종 착시현상을 초래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성작용’은 우리 영혼의 촉수를 움직이게 합니다. 세상의 높낮이와 내면의 크기를 스스로 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죠.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달은 저를 따라왔습니다. 그 달의 뒷면으로 높은 데 올라 잘못을 비는 아이의 얼굴과 세속도시에서 자주 착시에 빠지는 제 얼굴이 함께 겹쳤습니다. 오, 여행지에서 발견한 달의 두 표정이라니!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