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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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연수의 듣는 소설헨리 제임스는 ‘꿈을 말하면, 독자를 잃는다(Tell a dream, lose a reader)’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소설가들 사이에서 꿈 이야기를 소설에 쓰면 안 된다는 불문율로 자리잡았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한참 읽었는데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식으로 끝나면 곤란하다는 뜻이다. 어떻게 많은 투고작을 다 검토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한 에이전트는 등장인물이 꿈 이야기를 시작하면 바로 던져버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건 독자를 잃을 각오를 하고 쓰는 이야기인 셈이다.
2년 전, 대구의 한 대학교에서 강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KTX를 탔을 때의 일이다. 그 즈음 나는 거의 몇 달째 잠다운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도 잠은 의식의 발목 정도나 겨우 적실까 싶을 정도로 얕았고, 그 얕은 잠마저도 눈을 감은 내내 출렁거리며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고 있었다. 강연도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일부는 잠든 상태로 나는 떠들어대고 있었다. 창의력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만 합니다. 그런 소리를 나는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자리를 찾아 앉고 싶었다. 그리고 자고 싶었다. 내 좌석은 17호차 2D, 문에서 두 번째 통로 자리였다. 내 옆자리, 그러니까 2C의 승객은 젊은 여자였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 곤히 잠든 얼굴이었다. 잠에도 이목구비가 있다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얼굴은 수면 그 자체였다. 나는 외투를 벗어 가방과 함께 선반 위에 올린 뒤, 자리에 앉았다. 나의 잠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기에 타인의 잠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내가 자리에 앉아 눈을 붙이자마자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시 눈을 떠보니 그녀는 깨어 있었다. 마치 눈을 뜨면서 잠이라는 베일을 걷어버린 여인처럼, 그 순간 비로소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다지 크지 않은, 쌍꺼풀이 없는 두 눈에 갸르스름한 턱선을 가진 삼십대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매끈한 이마와 부드럽게 솟아오른 콧날 덕분에 옆자리에 앉아서 보는 얼굴이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녀도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민망해져 앞좌석 그물망에 꽂힌 <KTX매거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밤의 어둠에 기댄 광화문이 표지사진이었다. 門. 化. 光. 평상시 읽는 순서대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한자를 읽는데,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gettyimagebank
“혹시 저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이라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가 말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힘을 뺐다.
“소설 쓰시는 분, 맞죠?”
“저, 아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물었다.
“예. 친구가 선생님을 무척 좋아해서요.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다니 꿈만 같네요.”
“저 때문에 깨셨다면 미안합니다.”
나는 얼른 사과했다.
“선생님 때문에 깬 건 아니에요. 그땐 곤히 자고 있었어요. 방금은 아기가 우는 바람에.”
오른손 검지를 들어 자기 귀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아기가 언제 울었다는 건가요?”
그러자 그녀는 아, 하고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고개를 빼고 주위를 둘러봤다. 객차 안에는 기차의 진동음, 누군가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음악소리, 앞쪽 어딘가에서 서로 속삭이는 듯한 두 남녀의 대화 등이 희미하게 떠다닐 뿐, 거기 잠에서 깰 만큼 크게 우는 아기는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변명하듯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를 따라 화장실까지 걸어갔다. 화장실에서는 거울을 보며 정성스럽게 손을 씻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잠시 눈을 감았을 때, 나도 모르게 깜빡 잠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때 곤하게 자던 그녀가 깰 정도로 시끄러운 아기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 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객차에는 분명히 아기가 ‘없었다.’ 화장실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둘러봤는데, 아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환청이었을 것이다.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본인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일을 두고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수면 부족의 영향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창의성은 충분한 수면에서부터 시작한다고? 거울을 보며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비웃었다. 거울 안에는 몇 년째 소설다운 소설을 쓰지 못한 소설가가 서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문을 열고 17호차로 들어갔다. 내 자리는 멀리 반대쪽에 있었다. 그쪽을 향해 걸어가는데 내 좌석이 있는 쪽의 문이 열리면서 남녀가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밤색 가죽가방을 맨 남자는 승차권과 좌석표시판을 대조하며 자리를 찾았고, 검은 상의에 머리를 뒤로 바짝 당겨 묶은 여자가 뒤따랐다. 남자가 찾는 자리는 우리 바로 앞자리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황급히 일어선 여자의 품에는 아기가 있었다. 조용했던 객차 안이 일순간 시끄러워졌다. 눈은 감고 있던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중에는 잠에서 깬 듯 기지개를 켜는 사람도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울기 시작한 아기는 여자가 품에 안고 일어나 어르는데도 좀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여자와 아이를 지나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옆에 앉은 여자에게 물었다.
“설마, 아까 이 소리를 들었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녀는 난감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 소리를 들은 거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