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뒤로 나는 요즘 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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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땐 영웅담에 열광하지만대공황의 최악은 1929년이 아니었다. 10여 년간의 등락 끝에 1937년에 경기가 다시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10년을 버텨냈는데 다시 두려움이 빠르게 확산했다. 이때 코믹스가 희대의 걸작을 내놨다. 보통 인간과는 다른 존재, 슈퍼맨이다. 슈퍼맨은 시리즈를 반복하며 ‘과거’의 왕처럼 세상을 지배하려는 녀석들을 혼내줬고 코믹스는 떼돈을 벌었다. 2008년에 위기가 다시 터졌고 공포가 돌아왔다. 이번엔 마블이 나섰다. 아이언맨(2008), 헐크(2008), 토르(2010), 캡틴아메리카(2011)가 차례로 등판했다. 다들 인간과 매우 다른 존재다. 그러다 ‘하나로는 약발이 달린다. 떼로 가자!’고 작정했는지 어벤져스(2011)를 내놨다. 떼로 나온 그들은 ‘과거’의 황제처럼 지구를 차지하려는 녀석들을 여러 번 조졌고 마블은 떼돈을 벌었다. 걔들 떼돈 번 건 그렇다 치고 왜 인간은 두려울 때마다 초월적 영웅 이야기에 빠지는 걸까?
위대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비루한 리더십'은 결국 실패
30년 前 "다 바꾸자"던 그분처럼
대담한 미래 보는 리더가 그립다
전영민 롯데벤처스 대표
‘악의 평범성’이라는 놀랍도록 난해한 용어를 만든 한나 아렌트는 <책임과 판단>이라는 벽돌책에서 ‘위기나 진정한 전환점에서는 과거가 미래를 위한 빛의 투사를 중단하기 때문에 인간 정신이 어둠 속에서 방황한다’고 했다. 쉬운 것도 어렵게 설명해내고야 마는 묘한 재주를 가진 분들을 ‘학자’라고 한다니 어련하실까! 대략 쉽게 풀어보자면 ‘세상이 빠르게 바뀌면 기존 경험만으로는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 다들 두려움에 빠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단호하고 확신에 찬 ‘위대한’ 영웅에게 기대고 싶어진다.슈퍼맨의 시대에는 히틀러, 무솔리니, 일본 군부가, 어벤져스의 시대에는 러시아, 중국, 헝가리, 튀르키예, 필리핀에서 자기가 제일 강하고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리더들이 등장했다. 한때는 미국과 영국도 그랬다. 문제는 그들이 내세운 게 모두 ‘위대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미래상’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미래? 정작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빛의 투사-빛나고 매력적인 미래’인데 위대한 과거로? 방향을 한참 잘못 잡았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나쁜 기억력과 상상력 부재가 낳은 비루한 리더십인데도 불안한 군중의 무의식을 기가 막히게 잘 읽어낸 그들에게 대중은 열광했다. 그만큼 시대적 두려움이 무거웠던 것이다.
그러면 비루하지 않은 리더십은 무엇일까? 당연히 시대와 상황에 적합한 리더십이다. 노나카 이쿠지로 교수는 사회가 성숙하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자연스럽게 진화한다고 했다. 초기에는 강제력(군대와 경찰, 검찰)이 세지만 합법적인 힘(공식적인 직위나 직책)으로, 다시 보상(연봉, 성과급, 스톡옵션)으로 힘의 축이 이동한다는 말이다. 좀 더 발전하면 전문성이 힘을 발휘한다. 코로나19 초기에 우리는 큰 권력도 없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조곤조곤 풀어놓는 이야기에 군말 없이 따랐다. 그게 전문성의 힘이다.
더 발전하면 분명하고 매력적인 목표가 만들어내는 일체감의 힘이 통한다. 존 F 케네디가 그랬다. 소련과 인공위성 경쟁을 하던 시절에 아예 달에 보내자는 선포를 했다. 그것도 1970년이 오기 전이라는 단서까지 달아서. 미국인들은 빛나는 비전에 열광했고 국방비보다 더 많은 예산을 썼지만 누구도 비판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돌 맞기에 ‘딱’이었기 때문이다. 케네디는 암살로 퇴장했지만 1969년에 약속은 지켜졌고 그때 나온 파생기술들은 세상을 바꿔놨다. 일론 머스크는 ‘과거’의 달이 아니라 화성을 내놨다. 어이가 없지만 그 비전에 매료된 천재들이 몰려들어 로켓 재활용과 스타링크를 만들어 우주 시대를 다시 열었다. 인류가 화성에 가긴 갈 것이다. 머스크 생전에는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변덕이 죽 끓는다는 단점에도 그가 성과를 내는 이유는 미래를 향한 대담한 비전이 주는 힘이다.
30년 전인 1993년, 국내에서만 이름값 하던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세계 1등 제품을 만들”기 위해 “처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하셨다. “웃기신다”는 생각을 한 지 30년이 지났고 글로벌 초일류가 된 그 회사를 모르는 사람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결국 ‘웃긴 건’ 세상 물정 모르던 나였다. 확실한 건 그때 그분도 ‘라떼’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 쪽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리더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