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NO" 손사래 칠 때 해외진출 성공한 혁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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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움직이는 금융인 100人2001년 3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사진)은 미국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수학을 위한 유학길이었다. 그의 나이 44세, 창업 5년차에 접어들던 시기였다. 닷컴 거품이 붕괴하던 때이기도 했다. 유학길에 오른 박 회장을 놓고 “도피성 유학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상당했지만 그는 비행기에서 “한국 금융이 성공하려면 해외로 뻗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2년 동안의 유학 기간에 그는 “미래에셋을 수출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경영 목표를 확신했다.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이듬해인 2003년 12월 홍콩에 미래에셋의 첫 해외 법인을 설립했다. 당시 박 회장은 “앞으로 미래에셋그룹 수익의 50%를 해외에서 가져오겠다”는 포부를 공개했지만 임직원 반응은 시큰둥했다. 회사 내부에선 “국내 1위 자산운용사 자리만 지켜도 충분하다”는 의견이, 외부에선 “해외 비즈니스를 하겠다던 시중은행이 무더기로 문을 닫았다”는 비아냥이 나왔다. 박 회장은 “현실에 머무르면 미래는 없다”며 임직원을 다독였다.첫 해외 진출 이후 20년이 흘렀다. 당시 박 회장이 내걸었던 경영 목표의 8할 정도가 달성됐다. 지난해 기준 미래에셋그룹의 해외법인 세전이익은 약 4468억원으로, 전체 이익 1조9653억원의 22.7%에 달한다. 작년 말 기준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총운용액 277조원 중 해외 비중은 112조원(40.4%)이다. 2003년 12월 홍콩법인이 사무소를 낼 당시 직원은 8명 남짓. 20년이 흐른 지난 5월 말 기준 해외 임직원은 3291명으로 약 20년 만에 400배 이상 불어났다. 전체 미래에셋그룹 임직원(1만2587명)의 26%에 달한다. 선진 금융회사들이 득세하는 자본시장에서 창업을 통해 세계 무대 반열에 오른 아시아권 회사는 미래에셋그룹이 유일하다.
박 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금융인들은 박 회장에 대해 “ 자본시장의 혁신가”라고 입을 모은다. 해외 시장 개척뿐만 아니다. 뮤추얼펀드, 인덱스펀드, 랩어카운트, 사모펀드(PEF) 등 국내 자본시장 대표 상품 ‘1호’는 미래에셋 몫이었다. 박 회장의 경영철학을 꿰뚫는 핵심 가치가 ‘도전과 성장’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좌동욱/최만수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