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에 놀란 호랑이·고흐 밀밭에 소나기…비를 그린 화가들

[장마철에 감상하기 좋은 명작들]
쏟아지는 빗속에서 오리를 모는 한 소년. 빗줄기가 제법 세찬 데다 버드나무 잎이 흔들리는 모양을 보니 요즘처럼 궂은 날씨임에 틀림없습니다. 웃옷을 벗은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한여름 장마철이네요. 장마를 암시하는 디테일은 또 있습니다. 오리도, 소년도 그다지 놀라거나 허겁지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헐레벌떡 뛸 만도 한데…. 눈 깜짝 않고 뚜벅뚜벅 박자 맞춰 걷는 맨발의 소년과 오리떼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우중구압(1958) 종이에 수묵채색, 141×186㎝, 한국은행 소장.
이 그림은 조중현이 1958년 그린 ‘우중구압’(雨中驅鴨)이란 작품입니다. ‘빗속에 오리를 몰다’란 뜻의 우중구압은 세밀한 표현력과 아름다운 구도에 비해 한국 근대회화작품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그림이죠. 한국은행이 소장한 이후 소장품전 등을 통해 일반에 소개하면서 그 진가가 알려졌습니다. 동물·물고기·꽃 등을 소재로 수묵화·세필채색화를 즐겨 그렸던 작가는, 근대 한국화 6대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스승 이당 김은호(1892∼1979)로부터 배웠습니다. 스승은 자신의 제자 중 재주가 제일 간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비를 그린 그림은 귀합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통틀어 비를 묘사하거나 빗방울을 그린 그림은 한 점도 없습니다. 비를 직접적으로 그리기보다 비 오는 날의 감정이나 주변의 모습을 그리는 등 그 분위기에 집중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여백의 미를 중요시했던 한국화의 특성 때문일 까요. 빗방울은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공평하게 메우니까요. 이 그림은 근대회화에서 현대미술로 전환하는 시기인 1958년에 그려졌습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파리, 비 오는 날' (1877)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비 오는 날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새롭게 보도록 하죠. 화가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준 날들이기도 했습니다. 서양 미술에선 비 오는 풍경을 다룬 시기가 인상파 시기입니다. (귀족의 전유물이던 우산이 산업혁명을 거쳐 대량생산되기 시작하던 시기와 겹칩니다!) 컬렉터 출신 작가인 구스타브 카유보트는 1877년 '파리, 비 오는 날'을 212.1x276.2cm 대형 캔버스에 그렸지요. 분명 비 오는 날인데, 사람들은 밝은 얼굴에 아무 일 없듯 걸어다닙니다. 거리와 하늘을 보면 비가 오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어쩐지 밝고 평온해 보이는 것이 '우중구압'의 무드와도 닮았습니다.
모리스 브라질 프랜더개스트 '빗 속의 우산-베니스' (1899).보스턴미술관

비에 관한 명화 중엔 모리스 프랜더개스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캐나다 출신으로 미국, 파리에서 활동했던 모리스 프렌더개스트는 서정적이고 세련되면서도 자유로운 붓터치로 유명합니다. 점묘법을 쓰기도 한 이 작가의 그림엔 투명한 수채화가 가지는 경쾌함과 섬세한 붓터치가 느껴지죠. 분명 비오는 날의 그림인데, 색색의 우산들이 마치 화창한 날 봄꽃이 핀 것처럼 보이는 그림입니다.
윌리엄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대서부역' (1844) 영국 내셔널갤러리

비에 관한 명화를 꼽으라면 J. M. 윌리엄 터너의 작품 '비, 증기, 그리고 속도-대서부역'도 빠지지 않지요. 비와 대기가 서로 엉겨 소용돌이치는 한가운데를 증기기관차가 뚫고 나오는 역동적인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영국의 템스강을 건너는 초기 증기기관차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터너가 그림 그리기 전 비 오는 날을 골라 런던에서 엑서터로 달리는 대서부철도 기차에 몸을 싣고, 차창 바깥으로 몸을 몇십 분간 내밀며 관찰한 결과입니다. 비 오는 풍경을 온몸으로 느낀 뒤 완성한 작품이라 이렇게 실감나나 봅니다.
빈센트 반 고흐 '빗속의 밀밭' (1889). 필라델피아 미술관

태양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햇빛의 인상을 포착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장대비도 사랑했나봅니다. 밀밭 위에 억세게 퍼붓는 장대비를 캔버스 위에 거침없이 표현한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고흐가 프랑스 남부 생레미의 생 폴 병원에 자발적으로 들어간 해입니다. 병원에서 지내던 고흐의 눈에 프로방스의 밀밭이 보였고, 11개월간 그는 14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밀밭 그림 중 하나가 이 작품입니다. 1889년 10월 31일의 한 장면으로 추정되지요. 그날은 생레미에 폭우에 가까운 소나기가 내렸고, 고흐는 이를 멍하니 보다가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앙리 루소 '열대 폭풍우 속의 호랑이' (1891), 런던 내셔널갤러리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는 야생동물과 무성한 초목을 묘사한 수많은 그림을 그렸죠. 루소는 군대에 있을 때 밀림에서 지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는 프랑스 밖으로 한번도 나가본 적 없다고 하지요. 모두 식물원과 동물원을 찾아다니며 스케치를 했고, 상상력에서 나온 장면들로 완성한 그림들이라고. 천둥번개가 치는 열대우림 속에서 놀란 눈으로 내달리는 이 호랑이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걸까요. 아니면 먹잇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뛰는 걸까요.
훈데르트바서 'The rain falls far from us'

마지막 그림은 '오스트리아의 가우디'로 불리는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입니다. 훈데르트바서의 이름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작가의 본명은 Friedrich Stowasser로 이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지은 것이죠.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작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유대인 탄압으로 친척이 몰살당하기도 했지요. 환경과 평화에 대한 갈망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모든 자연, 모든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화가이자 건축가로 유명합니다. 이 그림에서도 쏟아지는 빗방울과 이를 반기는 나무와 숲의 마음이 느껴지나요. 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 역시 안온합니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