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도 못 만든 걸 만들겠다?…자신감 드러낸 日 기업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日 반도체 부활 전략 뜯어보니(1)

88년 세계시장 석권한 日 점유율 6%로 추락
민관 합작기업 라피더스로 삼성·TSMC 잡는다
"20년 격차 5년내 따라잡아 매출 1조엔 달성"
미중 패권경쟁은 일본에 '신이 내린 선물'
미국 프로야구 최하위 리그인 루키리그에 막 입성한 선수가 있다. 스스로도 “메이저리그와의 격차는 20년 정도”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이 선수는 4년 내 오타니 쇼헤이의 최고 구속을 뛰어넘고, 메이저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인 애런 저지의 홈런 기록을 깨겠다고 공언한다.

메이저리그 스타 집안 출신이라는 점과 최고급 장비로 현역 메이저리그의 개인과외를 받는다는 점이 자신감의 근거다. 일본 정부와 대기업들이 ‘사무라이 반도체의 부활’을 내걸고 작년 8월 설립한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의 상황을 야구에 빗댄 얘기다.
1988년 일본 반도체는 세계 시장의 50.3%를 차지한 메이저리그의 슈퍼스타였다.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가운데 6곳이 일본 기업이었다. 지금은 점유율이 6%(2021년)까지 떨어졌다. 현재 일본이 만들 수 있는 반도체는 40㎚(나노미터·1㎚=10억분의 1m)급에 머물러 있다.

히가시 데쓰로 라피더스 회장은 최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3㎚급 양산을 시작한 삼성전자와 TSMC에 비해 20년 정도 뒤처졌다”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2030년대 초반에는 삼성전자와 TSMC도 아직 생산하지 못하는 1㎚급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겠다고 발표했다. 2025년 2nm급 반도체 시제품을 생산한다는 일정표도 제시했다.
IBM과 벨기에 반도체 연구개발 기관 imec으로부터 반도체 제조기술을 전수받고, 세계 최고 수준인 자국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접목하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라피더스는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까지 총 5조엔(약 46조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한다. 시제품 라인을 만드는데 2조엔, 양산 라인을 까는데 3조엔이 들어간다. 일본 정부가 약속한 보조금은 10분의 1도 안되는 3300억엔에 불과하다.

2nm 반도체를 만드는데는 1000~2000가지의 공정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려면 설비 운영자를 포함해 1000여명의 엔지니어가 필요하다. 라피더스가 현재 확보한 엔지니어는 100명이다.
고이케 아쓰요시 사장은 지난달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절반인 500명의 기술자로 양산 공정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을 도입하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아직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2030년대에 매출 1조엔을 달성하겠다"는 실적 목표치도 제시했다.라피더스의 스토리를 요약하면 기술, 자금, 인력, 경험 어느 것 하나 없는 신생 반도체 회사가 삼성전자도 아직 못 만드는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어서 2035년 무렵에는 네이버(작년 매출 8조2201억원)보다 큰 회사로 성장하겠다는 것이다.

성공하려면 모든 경우의 수가 다 맞아떨어져야 하는 라피더스의 계획은 실현 가능한 걸까. 일본에서 만난 한일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일본 정부와 기업 관계자들을 접촉해 보면 일본이 반도체 산업을 살리려는데 필사적인 것 같다"라는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라피더스의 믿는 구석은 뭘까. 시간을 잠시 70여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는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 준 선물이다. 이제 일본은 살았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된 일본은 점령국 미국의 재벌 및 산업 해체 전략에 따라 평범한 농업국으로 전락할 처지였다. 한국전쟁 덕분에 일본은 막대한 전쟁 특수를 누리며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부활했다.

오늘날 세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맞붙은 상황은 일본에 또다시 신이 내린 선물이 되고 있다. 소멸 위기에 몰렸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킬 기회가 되고 있어서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