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나의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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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리윤의 부드러운 재료
『가용 공포』
<가느다란 장애물>
<가느다란 장애물>
Q. 당신은 당신을 넘치는 이미지를 어떻게 대하려 합니까? 당신은 당신을 초과하는 이미지를 다룰 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미지의 볼 수 없는 부분이 무섭지 않습니까?
A. 나는 언제나 눈앞에 있고 손에 잡히는 범위 안의 풍경만을 풍경으로 대하려 합니다. 팔이 닿을 수 있고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범위 안쪽의 공간. 그것이 내가 가진 공간의 전부라고 믿고, 일시적으로 내가 가진 공간만이 공간의 전부라고 믿으려 합니다. 내 몸이 닿는 이 작은 공간은 조각도 아니고 파편도 아니며 세계는 퍼즐이 아니지요.그럼에도 이 공간 안에서 충분히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 때, 사방으로 이만큼의 공간을 이어 붙이듯 움직이다 보면 세계라고 할 만한 것이 눈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각각의 공간들은 어깨동무한 것처럼, 허리를 감싼 것처럼, 팔짱을 낀 것처럼 서로 의존하며 이어져 있어요. 이런 여럿을 하나가 아니라고 할 까닭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연결 사이의 틈새, 이음매, 균열은 어딘가 아늑한 공포 같은 것을 품고 있고요.
물론 신체는 확장될 수 있습니다. 자루가 아주 긴 붓 같은 단순한 도구를 통해서요. 확장된 몸에는 곡선이 없고, 확장된 몸은 부드럽지 않으며, 스스로 주변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몸이 행하는 것 역시 내 몸의 움직임이라고, 그 몸이 향하는 곳 역시 나의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풍경의 테두리를 보며, 풍경의 테두리를 향해 내 몸이 가진 범위만큼씩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이 풍경의 전체를 보는 대신 부분의 내부에 머물며 겹을 더해갈 수 있습니다. 몸과 몸이 내포한 움직임을 붙잡아 고정한, 선과 색과 점의 겹들을요. 나는 이 겹들을 통해 무언가를 숨길 수 있습니다. 숨겼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분석에 복종하지 않는, 마주 보는 몸과의 거리가 변할 때마다 무언가를 숨기거나 드러내는 이미지. 환한 맹점을 품은 평평한 표면.나는 명확함을 빼앗고 싶습니다. 숭고함이 거대함과 맞붙어 있다는 생각을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단면‘들’을 통해서요. 멀리서 보면 매끄럽고 안전한 평면에 불과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볼 수 있는 범위를 좁힐수록, 당신의 눈길이 닿는 공간이 작아질수록 표면은 꺼풀로 쪼개지고, 당신이 휩쓸리고 헤매기 좋은 단면들로 변모합니다. 그것들은 조그마하고 얇고 이 표면을 만든 자의 움직임에 깃든 공포를 품고 있어서 숭고함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연약하고 보잘것없다는 인상을 주지요.
당신은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풍경에 잡아먹히면서도 편안함을 느낍니다. 당신은 당신의 몰입에 자꾸 끼어드는 흐릿한 레이어들을 조심스레 더듬으며 움직입니다. 단면은 어쩐지 복수형으로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단어지요. 단면들. 하나의 단면은 자기 뒷면에 다른 단면을 반드시 포개고 있습니다. 등 뒤에 다른 단면을 업고 있다는, 혹은 다른 단면에게 안겨 있다는 분명한 느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단면의 본성이지요. 단면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눈에 포착하려는 욕망 앞에서 언제나 달아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추적하는 당신의 걸음, 걸음마다 딸려 오는 부분, 달아나는 부분, 시선의 더듬거림, 그리고 그 아래서 벗겨지는 꺼풀들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움직임과 함께, 당신의 움직임과 그림의 연결을 통해서만, 당신의 움직임과 이미지의 관계 안에서만 이것을 볼 수 있길 바랍니다. 백사장을 헤매는 아주 작은 곤충처럼 겹과 겹 사이를 배회하기를. 전체를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필요한 일도 아니고요. 당신의 눈이 더듬을 수 있는 범위의 것만을 보면서 움직이고, 그 작은 부분들을 이어 붙이며 나아가세요.저는 이음매가 없는 풍경 앞에서 늘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움직이는 몸을 가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낯설고 어렵고 어색한 일이지요. 낯섦, 어려움, 어색함은 언제나 얼마간의 공포를 동반하고요. 우리가 이 사실을 천 번째나 만 번째로 깨달았다고 해도요.
시간이란 이 낯섦, 어려움, 어색함, 작은 공포를 견디는 순간들을 사방으로 이어 붙이는 일이죠. 당신이 추위에 껴입은 옷 때문에 확장된 자신의 몸이 차지하는 공간을 가늠하지 못해 여기저기 부딪히고 쓸리듯이, 이렇게 사방이 이어 붙여진 순간들은 언제나 낯선 것이라 여기저기를 상처 입게 되기 마련이고요.
시간이란 덧붙는 즉시 더럽혀지는 연약한 것이지만 즉시의 즉시, 그러니까 더 작은 즉시의 간격으로 계속해서 덧붙여지기 때문에 깨끗함을 자신의 속성으로 둘 수 있습니다. 보세요, 겹겹이 덧입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당신이 당신의 몸을, 몸의 움직임을 매번 어색해하고 매번 처음 보는 것을 보듯이 지켜본다 해도. 움직임이 닿는 범위만큼의 세계를 생각하고 그만큼의 바깥을 감당하는 일은 도움이 됩니다. 평면이란 포개며 쌓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얼마나 좋은지요.나는 언제나 곧고 평평하고 매끈한 표면에 가느다란 장애물을 두고 싶었습니다. 한눈에 볼 수 없도록, 언제나 가려진 부분을 가늠하며 주변을 서성이도록, 그런 움직임을 요구하도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서 당신의 몸이 볼 수 있는 범위만큼을 계속해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다시 세계를 더듬어 가도록. 눈으로 더듬는 세계에 가느다랗고 빛나는 장애물을 놓는 일. 그것이 제가 저의 움직임을 감당하며 하는 일입니다. 케이크 옆면에 붙은 비닐의 가장자리를 찾을 때, 두 장의 비닐이 포개져 만든 얇은 기둥을 보듯이. 손으로 매끄러운 표면에 숨어있는 갈라짐을 더듬듯이 눈이 이 표면을 더듬다 기둥에 걸릴 때, 거기서부터 벗겨지는 한 꺼풀의 세계가 있을 때. 탈각되는 한 겹만큼의 투명성을 당신이 획득하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가느다란 장애물 뒤에 이 평면을 둡니다. 눈을 잡아채고 고정하고 일단 고정한 것을 지속의 상태에 두고 싶어 하는 이미지의 본능을 방해하도록. 당신이 오돌토돌한 표면을 더듬으며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영원에서 박리된 채로 계속 휩쓸릴 수 있도록. 당신이 다룰 수 없는 겁 안에서 피로를 느끼며, 피로한 몸을 뉜 곳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며, 휩쓸리는 상태에서 아늑함을 느끼며.
*
<부드러운 집>
Q. 모든 표면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의미는 운동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세계는 운동 속의 매듭이다.1)
당신이 말했지요.
당신은 집을 안전한 입체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열거나 닫을 수 있는 문이 있고, 언제나 문 너머가 있고, 너머의 공간이 있고, 그곳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면…… 문을 열어둔 채로 문 너머를 지켜보고 있다 해도 문의 존재를, 언제든 닫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을 수 없다면…… 활짝 열린 문도 너머의 풍경을 가두는 프레임으로만 대할 수 없다면…… 그런 입체라면…… 당신이 망각에 서툰 사람이라면…… 집만큼 당신을 겁에 질리게 하는 것은 없다고. 문 달린 입구란 내일이라는 가능성을 한순간도 잊을 수 없게 만든다고. 집은 너무 위험하다고. 언제나 맹점으로 남겨지는 부분을 가진 공간이 무섭다고. 그런 사물과 함께인 채로는 도무지 지속되는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당신은 버석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눈을 비비며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손으로 모든 부분을 만지기는 불가능하고,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도록 수많은 벽과 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를 볼 수도 없는 것. 두 발로 더듬고, 더듬으며 상상하고, 상상 속에서 벽들을 연결 짓고 문을 허물고 기둥을 지워내는 방법으로만 얼기설기 이어진 한 장의 평면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걷고 눕고 달리고 뒹굴고 넘어지고 기어다니며 행한 모든 움직임과 누적된 기억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표면. 모든 시간을 얇은 피막으로 만들어 유실 없이 보관하는 두터운 벽. 집 안에 있는 이에게는 표피가 되는 집의 내부.
당신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모든 시간을, 시간이 가진 궤적을, 궤적의 찌꺼기를, 시간이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한 장의 이미지로 만들고 싶다고요. 이미지를 안다.2) 당신은 이미지를 알고 싶어 했고, 이미지로 알고 싶어 했고, 이미지는 안다고 생각했지요.
집이라는 알 수 없는 입체. 당신은 이 입체가 가진 무수한 단면을 겹쳐 한 꺼풀의 표면에 복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반투명한 벽과 흐릿한 윤곽의 흔적만이 증언으로 남은 문, 샅샅이 볼 수 있는 전체, 틈새 없이 내부와 외부 사이를 깨끗하게 가로지르는 집의 피부. 입체를 평면 안에 가두면, 납작하게 눌러 떠내면, 그러니까 시각을 통해서만 감각할 수 있는 입체, 양감 없는 입체로 만든다면, 모든 볼록함과 움푹함을 음영으로만 남겨둔다면. 입체에 대한 기대 자체를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든다면, 누구도 벽돌이나 계단을 보고 올록볼록한 양감을 기대하지 않게 만든다면, 문을 보고도 손잡이를 돌리거나 밀거나 당기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 않게 된다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요.
당신은 집을 입고 다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지요. 쉽게 구부러지는, 몸의 곡선을 따르는, 이동 가능한 구조를 지닌, 일종의 부드러운 껍질 같은 것만을 집이라고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입는 몸을 전제하고 집을 만든다는 건 아주 다른 일이 될 거라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입고 있는 집의 유연한 표면은 당신 몸과 표면 사이의 간격을 통해서만 공간을 발생시킵니다. 물론 당신은 그 공간을 볼 수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움직임을 한쪽 벽으로 설정하면서, 피부라는 당신의 외부와 피부를 포함한 당신 전체의 외부라는 세계가 함부로 부딪히지 않도록 좁고 어둡고 아늑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는 가변적인 사물. 시간과 부드럽게 뒤엉키며 호흡할 수 있도록 운동성을 내재한 사물. 환경의 움직임과 당신의 움직임에 즉시 반응하는 민감성을 지닌 사물. 관계 속에서만 발생하는 형태. 표면은 언제나 행위를 반영합니다. 표면은 곁에 선 몸의 움직임을 요구합니다.”
이때 나는 당신이라는 표면의 곁에서 당신 몸의 비언어적 표현을 포착하려 애쓰며 주의 깊게 작동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당신은 집이란 부드러운 외피를 입고 있어야만 한다고도 했습니다. 딱딱하고 견고한 물질로는 집을 만들 수 없다. 몸과 관계 맺음 없이 시간의 운동에만 반응하는 공간을 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깨끗하게 정돈하고 때를 벗겨내고 부서진 자리를 수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접근은 공간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환경이나 시간성으로부터 완고하게 격리될 실내를 갖는 것은 집에게 중요한 덕목이 아니라고요.
당신은 집을 이룰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것들의 표면을 만지고, 감싸고, 덮어씌우고, 벗기는 동안 살아낸 것, 지나간 것, 잊혀진 것들이 묻어날 거라고요.3) 집이란 시간을 잡아채어 정지시키는 사물이어야 한다고요. 집의 표면은 시간이 덧입은 인공 피부 같은 것이라고. 표면에 입혀진 질감은 모두 시간의 증거라고.
당신은 하나의 표면에 다른 표면들을 모조리 욱여넣듯이 새기는 것을 좋아하지요. 결코 만날 일 없을 시간들을 서로 만나게 하는 것. 얇고 가볍고 연약한 것, 쉽게 찢어지고 구멍 나는 것, 아주 가느다란 장애물에 걸리는 것만으로도 망가져 버리는 것, 지속성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그런 사물을 누르고 붙이고 다시 벗겨내어 영속성을 달라붙게 만드는 것. 사물의 표면에 시간을 고정시키는 것을요.
얇게 떠낸 벽들이 연결되고, 문 너머는 없고, 당신은 이제 집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지요. 살 수 없다 해도 입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집이다. 볼 수 있는 것도 집이다. 몸은 결국 당신의 외부일 뿐이며 세계는 몸의 외부일 뿐이다. 굳을 수 있는 액체와 액체를 머금을 수 있는 흡습성의 부드러운 물질만이 집을 줄 수 있다.
나는 현관문을 열 때마다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와 당신의 움직임을 생각합니다. 집의 표면에 새겨져 우글거리는 시간들. 당신은 어제를 오늘로 당겨오듯이 온몸으로 부드러운 표면을 거머쥐고 거머쥔 손에 체중을 싣습니다. 당신은 온몸으로 넘어집니다. 넘어진 당신 위로 집이 덧입어 온 모든 표면이 새겨진, 부드러운 한 겹의 이미지가 덮이고요. 당신은 아마 이렇게 아늑한 감각만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라고, 마침내 집이 있다는 감각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겠지요.
A. 그래요, 나는 모든 것이 이미지로만 보관될 수 있다는 생각 안에서 무척 편안합니다. 이제 나는 정말로 지속성에는 관심이 없고 섬광처럼, 깜빡임처럼 지나가는 잠 속에 아늑하게 누워있어요. 이것이 나의 집입니다. 집은 몸과의 관계 없이는 발생할 수 없지요. 몸은 동작을 품고 있고요. 움직임은 순간에 속하며 순간에 복무하고요. 집은 내가 요구하는 움직임일 따름입니다. 집은 나의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피부입니다. 어제를 끌어당겨 입는 동안 나는 내일에 도착해 있다고 느끼고, 무엇을 입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이 무척 산뜻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나는 집을 입은 채로만 정말로 멀리 갈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줄리 머레투의 SFMOMA 커미션 작업 'HOWL, eon (I, II)'(2017)과 하이디 부허 회고전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2023.3.28–6.25, 아트선재센터)와 그 도록을 재료로 쓴 것이다.
1)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2) Wisse das Bild (이미지를 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제 1부 9번 소네트 (1922). ;문지윤 '자개, 라텍스, 아카이브: 하이디 부허 세계의 물질성 연구',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아트선재센터, 2023)에서 재인용.
3)부허는 “살아낸 것, 지나간 것, 잊혀진 것들이 천에 묻어난다”라고 말했다. ;문지윤 '자개, 라텍스, 아카이브: 하이디 부허 세계의 물질성 연구',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 아트선재센터, 2023.
Julie Mehretu, HOWL, eon (I, II), 2017; commissioned by the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collection SFMOMA, gift of Helen and Charles Schwab; © Julie Mehretu; photo: Tom Powel Imaging, Inc. Julie Mehretu at work; courtesy the artist and Marian Goodman Gallery; © Julie Mehretu; photo: Tom Powel Imaging, Inc.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 전시 전경, 2023, 아트선재센터, 사진 촬영 김리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