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16) 전쟁 중 만든 영화 '낙동강'

1950∼53년 전란 속에도 한국영화 23편 제작…영화계 명맥 유지
한국 전쟁은 국내 영화계의 명맥을 끊어 놓을 뻔했다. 15일 부산연구원에 따르면 전쟁이 발발한 후 서울 충무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영화인 80% 이상은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당시 생계를 위협받던 피란 영화인들은 영화 제작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삶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 영화가 총 23편이 제작되며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신상옥 정청화 등 신임 감독이 데뷔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23편의 영화 중에서 당시 피란 수도인 부산에서 오롯이 촬영되고 제작된 영화도 있었다.

바로 1952년 2월 23일에 개봉한 영화 '낙동강'이다. 낙동강은 부산 출신 사진작가 김재문이 동구 수정동에 영화 연구소를 세운 뒤 만든 작품으로 알려졌다.

경상남도 공보과가 1천여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해 전창근 감독을 섭외하고 연출을 맡겼다.

16㎜ 흑백 필름으로 촬영된 작품으로 실제 전쟁뉴스 장면과 을숙도 갈대밭에서 배우들을 찍은 장면을 혼합해 세미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내용은 낙동강 변의 농촌 마을 출신인 이택균이 고향으로 돌아와 교사이자 애인인 지애와 협력해 무지한 마을 사람들을 일깨워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줄거리로 구성돼 있다.
이 영화에는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많은 예술가가 참가해서 힘을 보탰다.

원작 주제곡 가사는 시인 이은상, 음악은 김동진, 작곡은 윤이상, 기획과 재무는 독립운동가 한형석 선생이 각각 담당했다.

합창은 경남고, 부산고, 경남 상고, 경남여고, 부산여고 재학생들로 구성된 부산합창단이 맡았다.

제1부는 '전통의 낙동강', 제2부는 '승리의 낙동강', 제3부는 '희망의 낙동강'으로 구성이 이뤄졌다.

특히 윤이상이 작곡한 주제가는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호평을 받는다.

가사는 '굽이굽이 이 강 위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정의의 칼로 반역의 무리를 무찔렀나니, 오! 낙동강, 낙동강' 등으로 의지를 다지는 내용이다.

당시 이 영화를 관람한 총인원은 5만명으로 집계된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은 "전쟁의 어려움도 영화인들의 움트는 창작 열망은 막지 못했다"면서 "절망의 시대에도 영화의 꽃을 피워낸 작품들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