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무대 오른 사라 오트…그 발끝에서 베토벤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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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교향악단과 협연피아니스트 알리스 사라 오트는 이날도 맨발로 무대에 등장했다. 올해 서울시향과 협연한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 이후 두 번째 ‘맨발 연주자’였다. 단순한 퍼포먼스는 아니다. 그녀는 맨발로 페달을 밟아야 피아노와 더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연주
반짝이는 터치, 대범한 페달 운영
지휘 맡은 라이프, 입체적 곡 해석
국내서 듣기 힘든 곡 무난히 소화
알리스 사라 오트는 명료하고 감각적인 터치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시작했다. 매 순간 반짝이는 터치였다. 때로는 베토벤 음악의 구조 그 자체보다 스스로가 느끼는 표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했다.섬세한 페달 운영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음악을 리드미컬하게 만들다가도 긴 프레이즈에서는 대범하게 페달을 운용해 소리를 멋지게 번져나가게 했다. 1악장의 2주제에 이르러서는 노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왼손으로 베토벤 특유의 ‘스포르찬도’(그 음을 특히 세게 연주)로 통통 튀는 에너지를 전달하면서 오른손으론 노래를 했다. 서로 다른 캐릭터가 한 음악 위에 올라와 있었다. 3악장에 이르러서는 베토벤의 멋진 유머도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2악장을 시작하는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1악장이 끝나고 지휘자는 한참을 지휘봉을 허공에 두고 있었고, 협연자는 침묵 속에서 그대로 2악장으로 나아갔다. 마치 시간이 멈추고, 피아노만 홀로 무대에 있는 것 같았다. 이날 공연에서 베토벤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갔던 순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여린 음악들이 잘 표현된 걸 넘어서 음악들 사이의 침묵이 효과적으로 연출됐다. 소리를 가진 음들보다 오히려 침묵이 그 정서를 만드는 데 더 큰 역할을 했다. 적절한 침묵 속에서 긴장감은 한층 높아졌다.
2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덕분에 더욱 위력적으로 들렸다.지휘자는 소리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덕분에 첫 곡인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 3번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이 더욱 입체적으로 들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서도 거대한 소리 덩어리에 묻힐 목관악기의 작은 주제까지 살뜰히 챙겼다.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에서 날아온 객원 악장의 활약도 눈부셨다. 큰 몸동작으로 오케스트라 전체를 리드했다. 가장 선두에서 노를 잡았다.
말러나 브루크너의 음악도 연주하기 무척 까다롭지만, 국내 오케스트라의 무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라고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온갖 두꺼운 소리들이 아주 여린 소리들과 균형을 맞추고, 또 그 질서를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하는 작품은 더욱 그렇다. 그 어떤 오케스트라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자주 연주하는 천하의 빈 필하모닉조차 작년 내한 공연 당시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진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 KBS교향악단의 공연은 자신들의 기량을 웃돈 공연이었다. 물론 ‘과학에 관하여’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설계해둔 푸가가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기도 했고, 후반부에선 앙상블이 불안했지만. 하지만 중요한 건 국내에선 듣기 힘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입체적인 음향을 실연으로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공연이 아니었을까.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