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가 이태호의 글과 그림으로 되살아난 조선후기 화가 정수영의 '실경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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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이태호의 답사 스케치《정조시절 문인화가 지우재 정수영의 천리길 따라 - 한강, 그리고 임진강》은 미술사가인 저자가 실경산수화 <한임강명승도권>에 등장하는 명승지를 일일이 답사하며 글과 그림으로 재구성한 답사스케치이다.
문인화가 지우재 정수영(1743-1831)이 완성한 <한임강명승도권>은 한국 회화사에서 가장 긴 사생 스케치북이다. 1796년 봄, 종이 28장을 이어 붙여 만든 두루마기와 화구를 품에 안고 사생 유람을 떠난 정수영이 한강, 남한강, 한탄강, 임진강, 북한산, 관악산 등 2년 여간 명승을 두루 다니며 담아낸 실경산수화이다. 정수영은 정조 임금 시절 벼슬살이를 전혀 하지 않은 만 51살 선비였다.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의 경우처럼 거장 반열에 오른 것도 아니고, 유명 작가도 아니지만 모자란 그림 실력에 개의치 않고 천리 여행길의 흥취를 고스란히 담아냈다.미술사가인 저자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 꽂힌’ 것이 정수영 때문이라 고백한다. 1980년 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예사로 근무할 당시 정수영의 사생화첩 <한임강명승도권>과 <해산첩>을 접하며 그 어눌하고 미숙한 화법에 매료되었던 것. <한임강명승도권>의 핵심 명소인 신륵사를 처음 답사할 때 한겨울 강 가운데 얼음 위에서 신륵사 동대를 찍으며 찾바람을 맞은 기억은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다. 지우재 정수영을 전반적으로 소개한 글을 쓰기도 했다.
이후 작품조사나 현지답사를 진척시키지 못하다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전시 자문을 맡은 것을 계기로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과 관련해 35년 만에 남한강 신륵사를 다시 찾는다. 명소와 감격스레 재회한 저자는 마침 정년퇴직한 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3년여 간 정수영의 그림행방을 따라 여유롭게 답사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동안 불분명했던 지명과 장소를 확인하고, 연혁을 하나둘 밝혀나간다.
이 책은 정수영의 여정대로 명소를 소개하지 않고, 저자가 답사한 순서로 꾸몄다. <한임강명승도권>의 중심인 신륵사와 여주지역을 시작으로 정수영의 여정을 좇아 한탄강, 관악산, 도봉산, 임진강 일대를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도권의 출발 부분인 한강 지역으로 되돌아온다. 정감 넘치는 필치와 생생한 실경 스케치로 완성해낸 그의 답사스케치는 와유산수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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