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말, 노란 고양이… 프란츠 마르크의 ‘신비한 동물사전’

[arte] 한찬희의 너무 몰랐던 요즘 미술
“색은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다.”
-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뮌헨 출신의 독일 화가 프란츠 마르크는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연 속에 있는 동물을 주제로 삼았다.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요절해 작품 수가 많지 않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현대미술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그림으로 손꼽힌다. 청기사파(Der Blaue Reiter)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기도 하며 동물들을 통해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던 젊은 화가였다.
프란츠 마르크(1880-1916), <푸른 말 1> (1911). 칸딘스키와 함께 창시한 청기사파(Der Blaue Rieter)의 유래가 되기도 하는 이 파란색 말은 마르크가 가장 자주 그렸던 동물이다.

작가는 초현실적인 분위기에 역동성을 더하는 색과 형태를 사용한다. ‘푸른 말 1’에서는 말의 몸통을 그릴 때 짙은 파란색을 활용하여 근육을 명확하게 나타냈고, 뚜렷한 색면들로 기하학적 형태를 살렸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폴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말의 네 발굽은 각각 다른 색으로 칠해진 땅에 놓여 있는데, 빨강 초록 파랑 등 서로 다른 색들이 충돌하여 언뜻 보면 말의 다리가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화면 앞쪽을 장식하고 있는 풀은 진한 초록색으로 칠해져 보색 관계인 빨간색 배경과 대비를 이루고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기발한 색의 조합과 독특한 표현 방식은 마치 우리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비한 생명체를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프란츠 마르크의 <산토끼> (1909). 그의 초기 작업에는 인상파의 느낌이 아직 남아있다. 수풀의 잎과 가지의 표현은 반 고흐의 올리브 나무와 유사하다.
프란츠 마르크의 <고양이와 함께 있는 누드화> (1909).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색채의 해방을 이룬 마티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색이 아닌 작가가 생각하는 색에 대한 탐구와 시도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마르크의 그림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동물’이라는 일관된 주제가 있어 스타일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초반에는 프랑스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진 인상주의와 반 고흐의 화풍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후 앙리 마티스의 영향을 받아 야수파처럼 색채를 자유롭게 사용하였으며, 1911년 칸딘스키와의 만남을 통해 각 색에 담긴 정신성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칸딘스키는 당시 각 조형 요소에 의미를 부여했는데 색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랑은 땅의 색, 파랑은 하늘의 색, 빨강은 정열적이고 흥분된 감정이 넘치는 색으로 정의했다. 마르크는 이를 더 발전시켜 파란색을 통해 남성성과 건장함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노란색은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온화하고 차분한 느낌, 빨간색은 난폭함, 벅차고 갑갑한 감정을 나타낸다. 작가에게 색이란 정신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회화적 요소이자 매개체였던 것이다.
칸딘스키, <푸른 산> (1909), 캔버스에 유화, 구겐하임 소장.
칸딘스키는 1911년에 출판한 저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통해 각 색채가 가지고 있는 정신성과 회화적 표현 방식에 대해 정립했다. “회화는 작곡과 같다”고 한 것처럼 각 색과 형태는 음표와 기호처럼 고유한 의미를 갖는다.
칸딘스키, <고양이 두 마리, 파랑, 노랑> (1912), 바젤 현대미술관 소장. 한 마리의 고양이 안에 다양한 색들을 그려 넣어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해 내기도 했다.

마르크는 본인의 감정을 자연에 이입하고 색채에 물질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각각의 정신성을 가진 색으로 풍경을 채워간다. 동시에 우아하고 부드러운 리듬의 곡선적 표현으로 자연의 조화로움을 강조하였으며, 동물과 식물을 분리시키지 않는 구도로 화면을 구성한다. 그의 그림 속 동물들은 모두 평화롭다. 작가가 인간 세계에서 느끼는 피로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유토피아적 관점으로 담아낸 것이다. 실제로 그는 1913년부터 인물화를 그리지 않았고 동물화에만 몰두하기로 한다.
프란츠 마르크, <붉은 사슴 2> (1912), 캔버스에 유화,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미술관 소장.

그러나 당시 유럽은 불안한 정세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징후가 나타났다. 이러한 불안함은 마르크의 그림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늑대들- 발칸전쟁’에서는 날카로운 형태, 어두운 색채, 직선적 구도, 강한 색의 대비 등 이전에는 없었던 요소들이 등장한다. 밝고 평화로웠던 자연은 어둡고, 시들고, 불꽃이 타오르는 배경으로 바뀌었다. 그가 그려왔던 동물들이 이제는 단순한 사실적 표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상징성을 담는 하나의 언어가 되어 사회적 이슈들을 짚어낸다.
프란츠 마르크, <늑대들 - 발칸전쟁> (1913), 캔버스에 유화, 뉴욕 버팔로AKG미술관 소장.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1914년, 마르크는 독일군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전 마지막 그림들을 남겼다. 그중 ‘전투의 형태’는 당시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빨간색과 검은색이 소용돌이 형태로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이 두 형체는 마치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붉은 독수리와 푸른 뿔을 가진 검은색 황소 같기도 하다. 주변의 둘러싸고 있는 색들이 중심을 향하고 있고, 이곳저곳에서 색들이 겹쳐지고 충돌되고 있다. 이렇게 동물들이 본연의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색과 형태만 남는 마르크의 마지막 그림들은 추상화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란츠 마르크의 <전투의 형태> (1914). 작가에게 빨간색은 난폭함, 답답함, 검정색은 어둡고 슬픈 감정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