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고 속이고…"장난꾸러기 시인 한 명쯤은 괜찮잖아요?" [책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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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문보영 지음
문학동네
156쪽│1만2000원
문보영 시인 프로필 사진. (C)Photographer Hae Ran
'서점'이라고 적힌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내 간판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책은커녕 천장의 나무판자 사이로 모래가 쏟아지고, 바닥에는 모래가 산처럼 쌓여 있다. 도무지 현실 같아 보이지 않는 이 광경은 문보영 시인(31·사진)의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속 한 장면이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역자 후기'를 펼쳐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문보영의 시를 풀이한 '문보영 번역가'는 "편집하는 중에 푸른 눈의 당나귀를 마주쳤다" 등 내용과 상관없는 얘기만 늘어놓는다. 이쯤 되면 독자는 슬슬 눈치챈다. '모래 서점'의 간판처럼, '역자 후기'란 제목에 속았다는 사실을.
"시를 쓰면서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를 꼽으라면 장난기에요. 장난꾸러기 시인 한 명쯤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웃음)
최근 세 번째 시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을 출간한 문보영 시인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번 시집은 초현실적 배경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이야기 46편을 묶었다. 문 시인은 "현실을 다루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현실과 멀어진 세상으로 가게 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현실을 다루지만 오히려 현실에서 벗어난 시. 그게 문 시인의 장르다.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문 시인은 등단한 지 일 년 만에 김수영문학상을 안겨준 <책기둥>(2017)에선 환상 속 도서관에서 문학도들이 나누는 대담을 그렸다. 두 번째 시집 <배틀그라운드>(2019)에선 최후의 1인만이 살아남는 온라인 게임 세상을 담아냈다.
이번 시집에서는 이전 작품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했다. "지난 3년 동안 친구, 독자들과 낙서를 교환했어요. 제가 만든 세상을 소개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풀어냈죠. 장난기 가득한 낙서들이 일종의 사고실험이 됐어요."
상상 속 세계는 다양하다. 일례로 <캐셔> 속 한 식당에선 주스와 오믈렛을 먹기 위해 1억3000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항의하지만, '당신이 이곳을 방문함으로써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식당의 음식값이 포함돼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예전에 찾은 한 식당에서 '얼마입니다'를 '1억입니다'로 잘못 들은 오해에서 시작했어요. 음식값이 1억이면 어떨까. 그건 왜 1억일까. 포기해야만 했던 다른 길들의 값이 아닐까…. 혼자 상상을 이어가다가 이런 시가 나왔어요."
그는 시에서 알맹이와 껍데기가 겉도는 모습을 즐겨 표현한다. '모래 서점'이나 '역자 후기' 같은 간판은 허울일 뿐이다. 수록작 <거주자>에 등장하는 시인은 제목과 본문이 일치하지 않는 시를 써내고, <모로코후의 책>의 생명체들은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걸어 놓은 액자를 보이는 족족 떼어낸다.
"제목으로 시의 내용을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의 내용을 틀에 고정하기보다는, '딴소리'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를 독자들께 들려드리는 게 더 재밌으니까요." 문 시인은 다음 달 미국으로 향한다. 그는 "낯선 풍경에서 새로운 이미지가 떠오를 것을 기대한다. 적당히 진지함을 겸비한 장난꾸러기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첫 시집에는 장난기가 많았고, 두 번째 시집에선 적당히 진지해졌어요. 그 반동으로 이번 시는 장난기가 한 층 늘었죠. 반대로 다음 시집에선 좀 더 진지해지지 않을까요?"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