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재활용 앞세워 배터리 탈착 의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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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을 내세운 유럽연합의 기업 대상 규제가 쏟아지고 있다. 규제가 기업의 공급망 관리와 제품 디자인 및 설계 등 경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각별한 대응이 요구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EU와 협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한경ESG] ESG Now‘친환경’을 내세운 유럽연합(EU)의 기업 대상 규제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재활용 포장재 사용 등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 ‘스마트폰 배터리 탈착 의무화’ 등 제품의 상세 기능에도 규제를 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글로벌 기업에 부품 공급사의 환경 훼손 이력 등에 대한 보고를 의무화하고, 철강 등을 수입할 때 탄소배출권 구매를 강제하는 규제도 내놨다. 산업계에서는 ‘사실상 무역장벽’이란 지적이 나온다.
EU 의회 홈페이지를 보면 7월 14일 의회 본회의를 통과한 EU 배터리법에 한국 기업에 부담이 되는 조항이 대거 포함됐다. ‘배터리 탈착’이 가능한 스마트폰 판매를 의무화한 11조가 대표적이다. 법안에는 ‘휴대용 기기에 들어가는 배터리를 소비자가 쉽게 제거하고 교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디자인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삼성·애플, 설계·생산 라인 변경 불가피휴대용 기기는 스마트폰, 전자담배 등이다. 이대로라면 스마트폰 제조사는 유럽에서 배터리 탈착형 모델만 판매할 수 있다. 배터리법에는 EU의 친환경 정책 기조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글로벌산업 트렌드에 역행하는 규제”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더 얇고 디자인이 뛰어난 스마트폰’ 수요가 커지면서 삼성전자는 2015년 갤럭시S6부터 ‘일체형 배터리’를 프리미엄 폰에 적용하고 있다. 일부 스마트폰은 배터리를 떼는 게 가능하지만, 매출 비중은 크지 않다. 애플은 2007년 아이폰 출시 이후 배터리 탈착형 스마트폰을 생산한 적이 없다.
양 사가 배터리 탈착형으로 설계와 생산 라인을 변경할 경우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스마트폰의 설계와 생산을 모두 바꿔야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보통 스마트폰 제조사는 특정 시장에 특화한 제품을 개발해 출시하지 않는다. 탈착 가능한 배터리를 탑재하면 얇은 디자인을 유지하고, IP68 등급의 방수·방진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배터리 탈착 관련 조항을 알고 있고, 내용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추이를 지켜보고 대응할 것”이라고 전했다.
EU 이사회는 지난 7월 10일 배터리법을 공식 채택했다. 시행 시점은 2027년이다. EU 이사회는 2027년까지 유예기간에 대해 “제품 설계를 요구사항에 맞게 조정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EU는 ‘안전 등과 관련한 이유가 있을 경우 일체형도 허용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둬 협상 가능성을 열어놨다.오는 10월부터 EU가 시범 시행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도 기업의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철강, 알루미늄 등을 수입하는 기업은 제품 생산과정에서 탄소배출량을 보고하고, 기준을 초과하면 탄소배출권을 강제로 구매해야 한다. EU 역내에 제품 공장을 둔 삼성, LG 계열사의 부담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요소
EU의 대표적 ‘친환경’ 규제
제도 / 시행 시기 / 내용
플라스틱세(스페인) / 2030년 1월 / 재활용 불가능한 플라스틱 제품에 킬로그램당 0.45유로 세금 부과
탄소국경조정제도 / 10월 / 철강 등 수입 기업, 탄소배출량 보고 후 배출권 구매
에코 디자인 규정 / 연내 / 제품 개발 단계부터 재활용, 수리 가능성 등 고려
공급망 실사지침 / 2025년 / 납품 기업의 환경 훼손, 인권침해까지 보고·개선
지속가능성 공시 / 2025년 / 유럽 보고 표준에 근거한 지속가능성 경영 공시
자료: KOTRA, 한국무역협회
EU 배터리 시장 전망
(단위: 억 유로)
억 유로 / 110 / 170 / 270 / 350
연도 / 2015년 / 2020년 / 2025년 /2030년
자료: EUROBAT*참조공급망 정보, 경영 기밀 담아
2025년 시행 예정인 ‘공급망 실사지침’은 EU 내 매출 1억5000만 유로(약 2114억원) 이상 기업에 사실상 ‘경영상 기밀’을 요구하는 조항을 포함한다. 기업 사업장·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한 환경훼손과 인권침해 여부, 잠재적 부정적 영향 등을 파악해 개선하고 공개해야 한다.
EU는 이 같은 법안의 제정 취지로 한결같이 ‘친환경’과 ‘소비자 편익 제고’를 내세우고 있다. 산업계의 시각은 다르다. EU 내 첨단산업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목적이라는 의견이 많다. 예컨대 스마트폰 배터리 탈착이 가능해지면 배터리 재활용이 쉬워진다. 배터리 원자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 의존도를 낮출 수도 있다. 유럽에서 사용된 폐배터리에서 핵심 원자재 회수를 의무화하고 새 배터리를 생산할 때 ‘재활용 원료’를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게 한 조항도 비슷한 의도로 분석된다.
16개 전략 원자재를 집중 관리해 원료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핵심 원자재법’에 대해서도 ‘다른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략 원자재를 활용해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에 공급망 점검 결과를 2년마다 보고하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아예 EU가 폐배터리 역외 수출을 금지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역내에서 배터리를 판매할 경우 기존 폐배터리에서 나온 재활용 원자재를 쓰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 추진되면서다.
EU 배터리법은 저장용량이 2kWh를 초과하는 산업용 및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할 때 폐배터리에서 뽑아낸 재활용 광물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올 하반기 중 법이 발효되면 2031년부터 코발트 16%, 리튬·니켈 6%, 납 85%는 재활용 원료를 써야 한다. 2036년에는 이 비율이 더 높아진다.
여기에 유럽 2차전지 기업은 EU에 ‘폐배터리를 유해 폐기물로 지정해 역외 유출을 막아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EU 폐기물 선적 규정에 따라 유해 폐기물로 지정된 자원은 EU 지역 밖으로 수출이 금지된다. EU는 올 초 고철도 현지 철강업계의 요구에 따라 유해 폐기물로 지정해 수출을 통제했다.
세계 2위 전기차 시장인 EU가 폐배터리 수출을 규제하면 한국 기업은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안재용 KOTRA 브뤼셀 무역관장은 “EU 배터리법에 따라 재활용이 의무화되면 폐배터리를 움켜쥔 것 자체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며 “폐배터리를 어디서, 어떻게 충분히 확보할지가 향후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EU와 적극 협상해야”
EU 친환경 규제를 맞닥뜨린 국내 기업은 ‘피로감’을 호소한다. 친환경 포장재를 장려하는 수준을 넘어 제품 스펙까지 간섭하고 있어서다. 지난 3월 강화된 TV의 에너지 효율 기준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당시 국내 업체들은 일부 프리미엄 모델의 ‘판매 중단’ 위기를 맞았지만, 저전력모드를 기본 기능으로 하는 대안을 마련해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정부가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에 국내 기업의 상황을 알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가전업체 관계자는 “EU의 친환경 규제가 너무 빠르게 시행되고 있다”며 “미국과 아시아의 정보기술(IT) 업체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란 의심까지 든다”고 말했다.
황정수 한국경제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