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저탄소 전환 돕는 ‘탄소차액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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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무역 장벽이 현실화하면서 국내 기업의 저탄소 전환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탄소배출권 가격이 낮아 기업들이 저탄소 혁신기술에 과감하게 투자할 유인이 부족하다. 탄소차액계약은 정부와 기업이 장기계약을 체결하고 기업이 추가로 지출한 비용과 배출권 가격의 차액을 정부가 지원하는 제도다[한경ESG] 이슈 브리핑온실가스배출을 둘러싼 무역 리스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5월 유럽연합(EU)은 오는 10월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시행하기로 확정했다.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수소·전력 등 6개 업종에 우선 적용하고, 2030년에는 EU 배출권거래제(ETS) 전 업종을 대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그뿐 아니라 애플, 머스크, 오스테드 등 글로벌 거대 기업을 중심으로 스틸제로(SteelZero), 퍼스트 무버 연합(First Movers Coalition)같이 저탄소 제품 구매를 선언하는 자발적 이니셔티브 참여가 증가하고 있다. RE100(재생에너지 100%)이 국내 수출 기업에 큰 도전인 것과 유사한 양상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2015년부터 배출권거래제를 운영하고 있다. 2023년 7월 현재 국내 배출권 가격은 약 1만원 수준이며, 배출권거래제 도입 이후 1만~5만원 사이에서 변동했다. 즉 지금까지 배출권거래제는 한계감축비용이 5만원을 넘는 기술을 시장에 진입시킬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지 못했다.
배출저감 소요 비용 일부 정부 지원다양한 탄소중립 기술의 한계감축비용은 이를 크게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단법인 넥스트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수소환원제철 기술의 한계감축비용은 약 22만원으로 추산된다. 배출권 가격의 높은 변동성과 배출권 시장에 대한 정책 리스크 역시 기업의 저탄소 전환 투자 결정을 지연시키는 요소다.
이러한 배출권 시장의 한계를 보완하고 기업의 저탄소 혁신 기술 투자 유인을 제고하기 위해 최근 탄소차액계약제도(Carbon Contract for Difference, CCfD)가 주목받고 있다. 탄소차액계약제도는 기업과 정부 간 10년 이상 장기 고정가격계약 체결을 통해 기업이 온실가스배출 저감을 위해 추가로 소요한 비용에서 온실가스 시장가격을 차감한 금액만큼 정부가 지원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A라는 기업이 정부와 탄소차액계약을 맺고 기존에 쓰던 탄소집약적 기술 대신 새로운 저탄소 공정을 도입했다고 하자. 정부와 기업 A는 이산화탄소환산톤(tCO2)당 15만원에 장기계약을 체결했는데 현재 배출권 시장가격이 톤당 5만원이라면 정부는 기업 A에 톤당 10만원을 지급한다. 탄소차액계약은 쌍무계약으로 반대급부도 존재한다. 계약기간 중 배출권 가격이 톤당 20만원으로 급등한다면 이번엔 기업 A가 정부에 톤당 5만원을 지불한다. 개념상으로는 금융 또는 상품시장에서 리스크 헤지(hedge)를 위해 체결되는 차액결제거래(CFD)와 유사하다. 네덜란드, 독일 이어 한국도 도입 추진
탄소차액계약제도의 도입과 운영에 대한 논의는 유럽에서 특히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네덜란드는 2008년부터 재생 전력, 재생 열·생산 기술 보급을 위해 차액정산계약(CfD) 성격의 SDE+를 운영했는데, 2020년 하반기부터 저탄소 열·생산 기술을 추가해 SDE++로 확장했다. SDE++는 2023년 7월 현재 운영 중인 사실상 유일한 탄소차액계약 기반 제도다.
재생 전력, 재생 열뿐 아니라 산업용 히트펌프, 전기보일러, 탄소포집, 활용·저장(CCUS), 수전해 수소 등 기술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 SDE++의 예산은 2020~2021년 50억 유로에서 2022년 130억 유로로 증액됐고, 2023년에는 80억 유로가 책정됐다. 2022년 제도 운영 결과 약 120억 유로 예산이 약정됐는데, CCUS, 수전해 수소 생산 등 저탄소 생산 영역에 74억 유로가 배정됐다. 독일 역시 탄소차액계약 개념에 기반해 에너지 집약 산업의 전환을 돕는 기후보호계약제도를 준비 중이다. 지난 6월 구체적 운영 계획을 공개하는 동시에 참여 희망 기업의 정보를 수집하는 준비 절차를 공식적으로 개시했다. 독일 기후보호계약은 EU ETS에서 다루는 산업 활동을 지원 대상으로 삼는다. 네덜란드 SDE++와 달리 전력, 열, 수소 등 에너지 운반체(energy carrier)를 생산하는 프로젝트, 온실가스 이송 또는 지중 저장에 전념하는 프로젝트, 산업 제품 제조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 프로젝트 등은 부적격 대상으로 정의한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은 “기후보호계약을 통해 2045년까지 3.5억 톤의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이 제도는 기후를 보호할 뿐 아니라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항해 독일 내 청정기술개발 및 기후 중립 미래 구축에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탄소차액계약의 정의와 재원 등을 담은 EU ETS 개정법안이 지난 5월 최종 승인되면서 개별 국가뿐 아니라 EU 회원국 전체 차원에서의 제도 운영 가능성도 예측된다.
우리나라 역시 앞서 4월 확정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에서 저탄소 전환 지원책으로 탄소차액계약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따라서 국내 실정에 맞는 제도를 설계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다. 탄소차액계약이라는 동일한 개념을 공유함에도 네덜란드와 독일 제도의 세부 사항이 상이하게 구성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환 준비된 기업만이 수혜 가능
네덜란드의 SDE++는 북해 유전을 중심으로 CCS 기술을 일찍이 상용화하고자 하는 국가 목표와 맞닿아 있다. 독일의 기후보호계약은 제조업 비중이 높은 경제 특성을 반영해 철강, 시멘트, 화학 등 국내 제조산업의 전환 지원을 중심으로 설계됐다. 즉 탄소차액계약제도를 도입하려는 정책적 목표와 맥락에 따라 구체적 구성 내용이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탄소차액계약제도를 통해 어떤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가. 제조업 비중과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 특성과 점증하는 온실가스 배출 관련 무역 리스크를 고려할 때, 국내 제조 기업의 저탄소 전환 지원을 통한 수출 경쟁력 강화가 시급한 목표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 정부는 배출권거래제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배출권거래제 고도화 방안을 논의 중이며,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 달성을 위해 제4차 계획기간(2026~2030년)의 유상할당 비율과 무상할당 대상 업종 조정을 예고한 바 있다. 무상할당 축소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기업은 탄소차액계약제도를 통해 온실가스배출 저감 수익을 보장받는 동시에 배출권거래제 시장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일부 해소할 수 있다. 나아가 점증하는 무역 리스크를 오히려 수출 경쟁력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하지만 제도가 도입된다고 모두 수혜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존 설비를 저탄소화하겠다는 용단을 내리고 충분히 준비한 기업만이 탄소차액계약을 성사시켜 지원책을 향유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세록 사단법인 넥스트 선임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