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공짜 평양냉면'은 한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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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정상회담·민간 교류까지20여 년 전 통일부를 취재할 때의 일이다. 금강산 관광 대가로 북한에 5억달러를 비밀리에 송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남북한 적십자회담 취재를 위해 금강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배에서 만난 관련 기업 고위 관계자는 “수천만 평, 수억 평을 빌린 명목으로 임차료를 내야 했다. 북한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며 송금 사실을 처음으로 털어놨다. 북한은 남북한 교류 조건으로 뒷거래를 요구한 것이 체질화되다시피 했다. 통행세 명목이다. 북한 당국이 심지어 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 주민이 남측 가족으로부터 받은 달러를 거둬들인다는 설도 나돌았다. 남북한 정상회담 대가는 설로만 그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 남북 경협추진위원회에 참여한 경제부처 고위 관료는 이렇게 털어놨다. “평양에서 회담하고 있는데 청와대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북한은 당초 대북 지원 리스트에도 없는 것들을 요구해왔다. 그중에는 들어주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청와대에선 북한의 요구 사항을 웬만하면 다 수용하라는 지시를 했다.”
북한, 어김없이 대가 요구
이재명 대표 방북비용 송금 파문
"수사 아닌 정치"라며 부인하지만
北, 이 대표라고 '예외' 적용했을까
홍영식 논설위원
이 관료는 2007년 10월 열린 2차 남북한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일환이었음을 그 후에 알았다. 북한이 방북 대가에 얼마나 목매는지는 앞서 2000년 6월 열린 1차 남북한 정상회담에서도 확인된다. 방북 대가가 북한에 제때 전달되지 않으면서 방북 일정이 하루 늦춰졌다. 청와대가 겉으로 내세운 회담 지연 이유는 ‘북측의 기술적 준비 관계’였지만, 북한은 미납금이 입금된 뒤에야 김대중 전 대통령 방북을 허용했다. 북한에 돈을 준다고 해서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지는 별개 문제다. 그들은 언제나 자체 판단을 앞세웠다. 북한은 받을 건 다 받고 2006년 1차 핵실험을 저질렀다.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도 북한의 행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은 당시 원자바오 중국 총리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정상회담 제의를 했고, 대가를 요구했다. 2009년 10월 남북한 싱가포르 비밀접촉 때 정상회담 성사 조건으로 쌀과 비료 등 대규모 경제 지원 목록을 내놨다. 그해 4월 장거리 미사일 도발과 6월 2차 핵실험은 정상회담 대가를 받기 위한 압박용이었다. ‘도발-대화-보상 요구’라는 전형적인 수법이었지만, 이명박 정부가 거절하면서 정상회담은 수포로 돌아갔다. 2009년 11월 남북한 개성 접촉 땐 쌀 비료 지원뿐만 아니라 현금 제공도 들이밀었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북한은) ‘만나주는’ 조건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고 썼다. 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은 대북 사업을 위해 북측과 접촉했고, 북측이 현금을 요구해 골프채 가방에 100달러 지폐를 담아 중국 마카오를 거쳐 보냈다고 언론에 털어놨다.
쌍방울의 대북송금 사건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기지사 시절인 2019년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이 경기도가 추진한 북한 스마트팜 사업 비용(500만달러)과 이 대표 방북 비용(300만달러)을 북한에 송금한 사건이다. 관건은 이 대표 측 요청이 있었는지와 송금에 대한 이 대표의 인지 여부다. 김 전 회장은 ‘대북송금은 쌍방울그룹 뒤에 경기도와 강력한 대권주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뤄졌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강력한 대권주자는 이 대표다. 이 대표 측근인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까지 방북 비용을 쌍방울이 대납한 사실을 당시 이 지사에게 보고했다는 취지로 검찰에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표도 지사 시절 방북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이 대표는 이 전 부지사가 북측과 자신의 방북 논의를 할 계획이라는 기사를 공유하며 “이화영 평화부지사님 수고하셨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경제 번영을 이뤄나가는 길에 경기도가 함께합니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그러나 이 대표는 김 전 회장의 300만달러 대북 송금 진술에 대해 “검찰의 신작 소설”이라고 했다. 이 전 부지사의 ‘방북 비용 대납 보고’ 진술에 대해선 “검찰이 수사를 해야 하는데 자꾸 정치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전 부지사도 방북 비용 대납 보고 진술 내용이 파문을 일으키자 이를 부인하는 편지 내용을 공개했다. 그러나 평양냉면엔 공짜가 없다. 한국 대통령의 방북뿐만 아니라 민간 교류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통행세를 뜯은 북한이 이 대표에게만 예외를 적용했을까. 북한의 이런 행태를 몰랐다고 한다면 거짓이거나 순진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