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팔이 소녀의 시대 [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신사가 성냥팔이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네가 팔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구나.”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약간 다르게 써 본 건데 불쾌하게 느끼시는 분도 있겠다. 그러나 예단은 금물. 다행히 신사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신사가 팔라던 것은 소녀의 노동력이었고 소녀는 신사의 성냥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최초의 자기 발화 성냥은 1805년에 발명됐다. 부싯돌(정확히는 플린트 앤 스틸)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황 등을 바른 성냥 머리를 황산에 담가 발화시키는 방식이어서 불편하고 위험했으며 무엇보다 비쌌다. 1826년 마찰열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성냥이 발명된다. 불이 너무 잘 붙어 탈이었다(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아무 대나 그어도 칙 하고 불이 붙는 게 바로 이 성냥). 1844년 이런 단점을 보완한 안전 성냥이 등장한다. ‘성냥팔이 소녀’가 발표된 게 1845년이니까 소녀는 이 안전 성냥을 팔러 다닌 것이겠다. 불행히도 신사는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그의 공장에서는 적린 대신 백린을 사용했던 것이다. 고체 상태에서는 인체에 거의 무해한 적린과 달리 백린은 제조과정에서 독가스를 내뿜는데다 독성으로 턱뼈가 무너져 내리는 심각한 유해 물질이다.

공장 근무 2년 반 만에 소녀는 턱뼈 전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힘들게 모은 돈은 수술비로 다 날아갔고 신사가 퇴직금이라고 던져준 것은 성냥 몇 갑이 전부였다. 얼굴 아래쪽이 날아간 소녀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성냥을 팔다가 도시 어딘가의 골목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차라리 신사를 만나지 말고 얼어 죽는 게 나을 뻔 했던 삶이었다.
솔직히 나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흔해빠진 권선징악도 없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참담할 뿐인 이 작품이 동화로 읽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자녀의 성격을 음울하고 비관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이 동화와 같은 작가의 ‘외다리 병정’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럼 성냥팔이 소녀의 시대는 끝난 것일까. 40여 년이 지난 1888년 출간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에는 여전히 성냥을 파는 소녀가 등장한다(집에는 여전히 알코올 중독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종(種)의 차이를 무시한 채 갈대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제비는 조연이다. 수은주가 더 떨어지기 전에 따뜻한 이집트로 가야 했지만 제비는 그만 마음씨 착한 왕자의 동상을 만나 발이 묶인다.

하루만 더 도시에 남아 자신의 심부름을 해달라는 왕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그 하루는 계속 연장된다. 가난한 재봉사 여인과 아사 직전의 극작가 청년에게 검에 박힌 루비와 사파이어 눈 하나를 뽑아준 왕자는 팔고 다니던 성냥개비를 하수구에 빠뜨려 울고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남은 한쪽 눈을 저 소녀에게 가져다주려무나.” 성냥팔이 소녀에게 사파이어 눈을 배달하고 온 제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장님이 된 왕자였다.

제비는 속상한 새소리로 말했다. “제 이번 생에 이집트는 없나 보네요.” 그날부터 제비는 왕자의 몸을 덮고 있던 순금을 한 겹씩 떼어내 도시의 슬픔과 맞바꿨다. 왕자의 황금껍질 덕분에 사람들이 따뜻한 털옷을 입고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던 그 겨울의 어느 날 제비는 왕자의 입술에 마지막 키스를 하고는 떨어져 죽는다. 함부로 동정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려주는 동화다.성냥의 시대, 모두가 슬프고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스웨덴 하면 떠오르는 게 볼보자동차, 팝그룹 아바 그리고 농담 반 진담 반 스웨덴의 진짜 왕실이라는 발렌베리 가문이다. 1920년대 이 발렌베리 가문을 강력하게 압박했던 인물이 있다.

1929년 10월 28일자 ‘타임’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던 성냥왕 이바르 크뤼게르(Ivar Kreuger)다. 스웨덴의 성냥산업은 1845년 룬드스트룀 형제가 목재와 광물자원이 풍부한 남부 스몰란드 지방 옌셰핑에 성냥공장을 세우면서 시작된다. 이후 양질의 스웨덴 성냥은 효자 수출 상품이 되었고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성냥공장들 중에는 크뤼게르의 아버지가 세운 공장도 있었다.

1900년 스무 살 나이에 달랑 1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 간 크뤼게르는 7년 후 금의환향해 건설회사를 설립하지만 이내 가업인 성냥사업으로 업종을 바꾼다. 자금력이 탄탄했던 그는 무자비하게 중소업체들을 인수합병하면서 1917년 스웨덴성냥주식회사를 세웠다. 한때 전 세계 성냥 시장의 75%를 점유했던 성냥제국의 탄생이었다. 성냥 사업과 함께 그는 미국 투자 자본을 끌어다 유럽 각국 정부에 빌려주는 중개인 노릇을 했는데 이때 크뤼게르가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수익률은 무려 25%였다. 당연히 사기였다. 뒷사람 돈으로 앞사람 이자를 막았고 뒷사람의 이자를 위해 다음 타자를 물색했다. 오래 갈 수 없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크뤼게르는 연달아 자회사를 매각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사기극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1932년 3월 크뤼게르는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자살 혹은 살해당했다. 경제학자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그를 ‘사기업계의 레오나르도’라고 부르는 것으로 크뤼게르의 묘비명을 대신 썼다. 1946년 가스라이터가 발명되면서 성냥은 사람들의 손에서 잊힌다. 그러나 백린은 그 뒤로도 오래 살아남아 네이팜탄이 등장하기 전까지 백린탄이라는 이름으로 인류를 괴롭혔고 1980년 ‘특정 재래식 무기 사용 금지 제한 협정’으로 공식 금지된다. 성냥팔이 소녀의 시대는 그제야 비로소 상징적이고 문학적인 막을 내린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