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청중의 사이에 쏘옥. 스토리 전개를 돕는, 두 발레 작품의 피트 오케스트라

[arte] 이동조의 나는 무대감독입니다

1. Orchestra Pit

콘서트홀에서 음악만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달리 발레 혹은 성악이 곁들여진 오페라의 오케스트라는 오케스트라 피트라는 공간에서 연주한다. 이 공간에 악기가 자리 잡게 되는 방식은 앞뒤의 종대보다는 좌우의 횡대라는 표현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콘서트홀에서도 춤과 노래와 연기를 동반하는 발레 및 오페라 음악연주가 종종 이루어진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없는 콘서트홀에서는 보통 오케스트라가 무대의 뒤쪽으로 밀리고, 지휘자는 특별히 설치된 모니터를 보거나 아니면 고개를 객석 쪽으로 돌리는 수동적인 방법으로 춤 혹은 노래와 음악을 맞추고는 한다.이러한 상황의 오케스트라는 흡사 피트에 자리한 오케스트라의 모습 같고, 성악가 혹은 무용수들의 공간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오케스트라는 옆으로, 옆으로만 늘려야만 될 것처럼 보인다. 이 모습의 오케스트라를 고스란히 들어서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 피트에 넣으면, 아마 차이콥스키 발레 『호두까기인형』과 발레 『오네긴』의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모습이 될 것이다.

이제야 지휘자는 무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고. 동굴 같은 오케스트라 피트의 안, 옆으로 길고 앞뒤가 좁은 하지만 청중과 가장 가까이 위치하는 이 오케스트라 편성의 가장 큰 음악적 장점은 개별 악기들, 특히 콘서트홀 무대에서는 무수한 현들 속에 가려 뒤로 밀려 있다가 전진 및 중앙 배치된 목관악기, 그리고 객석 앞쪽과 거의 맞닿아 있는 금관악기 및 다양한 타악기들의 매력이 관객들에게 거의 직접 들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호두까기인형] 2막 엔딩 (Photo Kyoungjin Kim ⓒ Universal Ballet)
사진1. <호두까기인형 2막 엔딩> 크레딧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2. 발레 『호두까기인형』음악 속의 타악기들

하프의 선율이 소개하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의 멋진 군무가 펼쳐지는 장면인 <꽃의 왈츠> 혹은 차이콥스키가 그 존재를 첫 공연 전까지 숨기고 싶었다는 뒷이야기를 담은 악기인 첼레스타의 통통 튀는 매력이 발산되는 <사탕 요정의 춤>. 발레 『호두까기인형』 속에는 유명한 음악과 아름다운 장면이 어우러지는 매력이 곳곳에 숨어 있지만, 최근 만난 한 타악기 연주자가 전해준 선명한 이야기가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

"발레 호두까기인형 음악의 정체성은 타악기에 있습니다."

발레 『호두까기인형』의 음악도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하고, 많게는 열네 개의 타악기가 등장하는 버전, 적다 해도 기본적으로 십여 개의 타악기가 발레 『호두까기인형』 속 적재적소에서 활약하고 있다.저물어가는 <꽃의 왈츠>를 트라이앵글이 어떻게 마무리해주고 있는지, 팀파니를 도와 긴장을 이끌어 내거나 혹은 흥을 돋우는 베이스 드럼의 소리는 어떠한지, 첼레스타의 음색을 똑 닮은 글로켄슈필의 소리는 어느 장면에서 들려오는 건지,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화약과 그 총소리를 대신 구현하고 있는 윕(Whip)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타이밍을 맞추는 것인지, 올빼미의 날갯짓에 맞춰 시간을 알리는 괘종은 어떤 타악기가 치고 있는 건지, 노래방에서 춤을 추는 지인들과 힘껏 쳐대던 그 탬버린 소리가 호두까기 인형 속에서도 역시 얼마나 흥겨운지, 임전한 꼬마 군인들의 말발굽 소리와 전투의 느낌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어느 타악기의 역할인 것인지, 태엽을 감는 소리는 또 어떤 악기가 그걸 할 수 있는 것인지, 자녀 손에 쥐여 주고 잼잼을 시킨 그 짝짝이를 차이콥스키 역시 쓰고 있는 것인가 하는 올바른 궁금함까지.


3. Orchestra Pit Ⅱ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 착석한 오케스트라 피트. 열려 있던 연주자들의 뒷공간이 닫히고, 말 그대로 작은 ‘소리의 동굴’ 같은 피트는 청중보다 아주 조금 더 낮은 곳에 자리 잡은 듯하다.

클래식 홀 사방이 열린 공간으로 뻗어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소리와 위만이 열린 그 공간을 맴돌아 나오는 피트의 오케스트라 소리는 다르다. 열린 공간의 오케스트라가 잔향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 소리를 부유시킨다면 피트에서 나오는 오케스트라는 이미 그 피트 안에서 메아리와 울림을 한 번 담고 나온다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피트의 오케스트라에서 나오는 소리가 광활한 콘서트홀의 소리보다 더욱 매력적인 영역은 모든 악기의 솔로다. 혹시 매력적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적어도 확실히 드라마틱하다.
[오네긴] 2막 렌스키 솔로 (콘스탄틴 노보셀로프_ Photo Kyungjin Kim ⓒ Universal Ballet)
사진2. <오네긴 2막 렌스키 솔로> 크레딧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4. 차이콥스키 발레 『오네긴』중 한 장면

결투를 앞둔 두 명의 남자가 서 있다. 결투를 위한 무대의 배경을 전환하는 사이, 둘은 무언의 막간극을 펼친다. 이미 그 배경에 깔려 흐르는 혼과 잉글리쉬 혼의 대화. 먼저 혼이 한 남성을 등장시키고, 그 뒤로 비장한 걸음을 재촉하는 또 한 명의 남성을 잉글리쉬 혼이 따른다.

결투의 승부는? 다른 금관악기들과 함께하는 팡파르를 연상할 수도, 아님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사냥감을 채어오라는 신호의 뿔피리를 연상할 수도, 아님 '혼(Horn)'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두 악기의 물리적인 풍채를 비교할 수도. 차이콥스키는 이미 결투의 승부를 냈다.

이 결투에서 자신은 패자의 운명임을 알고 있는 남자는 홀로 죽음의 무도를 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입을 맞추고 시작되는 외로운 춤에, 차이콥스키 피아노 작품 『사계』 중 <10월(October)>이 흐른다. 쓸쓸한 가을 같은 선율을 수놓는 악기는 피아노의 건반이 아닌 비올라. 달이 걸린 무대를 배경으로 마치 운명의 줄타기를 하듯 추는 남자의 춤에 네 개의 현으로 음악을 더하는 비올라의 슬픔은, 남자의 뺨을 타고 흐르는, 바이올린보다 조금 더 굵은 눈물 같다.

차이콥스키 동명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음악을 사용할 수 없어 기존 차이콥스키 28개의 작품을 인용하고 편곡해 만들었다는 이 드라마 발레『오네긴』의 음악은, ‘발췌’의 어감이 갖는 풍부한 상상의 공간을 주고 다양한 색깔의 재료들을 서로 꿰어 만들어놓은 예쁜 퀼트의 예술을 음악과 춤과 이야기로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최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렸던 유니버설발레단 『백조의 호수』에서는 공연 시작 전 작품에 대한 설명이 짧게 진행되었다. 춤을 추는 이들의 손짓과 몸짓이 전통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이 작품 속에서는 어떤 혁신적인 발전과 변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있었다. 그 순간 자연스레 음악당에서 진행했던 한 짧은 프리토크의 내용 하나가 기억이 났다. 공연 시작 전 프리토크를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지네가 기어가는 모습을 언어가 더 잘 표현할까요? 아니면 음악이 더 잘 표현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프리렉처의 진행자는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지네가 기어가는 모습은 언어보다 음악이 훨씬 더 잘 표현하고 있을 것이라고. 동심처럼 혹은 일상처럼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데 있어 발레 『호두까기인형』의 타악기들은 그 설명을 대신해 혹은 언어를 대신해 너무나 훌륭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발레 『오네긴』의 현악기와 관악기는 슬픔, 절망, 좌절, 그리움, 회한, 안타까움 등 사람의 마음과 정서에 대해 역시 너무도 근사한 표현을 해주고 있다. 두 발레의 음악을 들으며 차이콥스키의 마음에 닿아 그 마음을 이해한 청자는, 이 두 발레의 음악이 춤의 곁에서 그리고 오케스트라 피트를 통해 얼마나 적절히 그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는지를 마음 깊이 숙지한 채, 고이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호두까기인형] 1막 눈송이 왈츠-Photo by Kyoungjin Kim ⓒ Universal Ballet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