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밀림에 1800억 '한옥의 미래' 지은 IT 1세대…7년 뜸들인 소나무집

조정일 더한옥호텔앤리조트 대표
10년 전부터 구상한 영월 남면의 '더한옥' 공개

"척박한 토종 소나무, 고집 센 대목장들과 동고동락"
소나무 제대로 말리는 데 7년 -> 2년으로 단축
1년에 출장 200일…"수백년된 집 지키는 유럽 부러워"

400~600평 독채로 18개동 직접 설계하고 가구도 제작
"한옥의 새로운 기준, 파격적 실험 다 해보고 싶다"

내달 종택 2채 선공개한 뒤 2025년 완공...해외도 진출
국내 정보기술(IT)업계 1세대의 창업가 한 명이 강원 영월군에 대규모 한옥 리조트를 짓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별 기대는 안 했다. 구한말의 '미스터 션샤인' 같은 시대극이 유행할 때마다 여러 차례 한옥에서 숙박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서다. 5성급 특급호텔에 맞먹는 가격의 한옥호텔, 강릉 전주 함평 등의 한옥마을, 서울 북촌의 한옥스테이까지….

하지만 어딘가 늘 불편했다. 풀벌레나 모기와 신경전을 벌이거나, 삐걱대는 마루가 거슬린다던가, 너무 좁고 답답하거나, 온도와 습도가 몸에 잘 맞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은 옆집이 신경쓰여 편히 쉴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 겉모습을 제외하면 한옥의 실내 곳곳이 '요즘 아파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기억만 남았다.
마지막 한옥 체험이라 생각하고 지난 26일 찾아간 강원도 영월 남면 북쌍리 문개실마을. 꼬불꼬불 밀림같은 숲을 한참 지나고 서강을 지나 언덕을 오르자 대문 뒤로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거대한 한옥이 펼쳐졌다. 툇마루에 신발을 벗고 종택 안에 들어서자 짙은 소나무향이 코를 먼저 자극했다.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매끈한 기둥과 단단하고 견고하게 천장을 들어올린 서까래, 틈이나 전선 하나 보이지 않는 세심한 마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진짜가 나타났다!'
독채인 두 동짜리 한옥은 대지 면적만 약 1400~1900제곱미터(400~600평). 긴 복도와 너른 마당, 철저히 독립된 침실과 거실까지. 각각의 집마다 마치 궁궐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이런 집은 누가 지은걸까. 하필 왜 이런 산골에 지은걸까. 질문이 마구 떠올랐다. 때마침 푸근한 인상의 주인이 등장했다. 그는 1990년대 세계 최초의 통합 교통카드를 만들고, 국내 신용카드 IC칩과 지역화폐 시장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의 조정일 회장(61)이었다.

이제 막 '더한옥호텔앤리조트 대표'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한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극한까지 해보고 싶었다"며 "우리의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 중 하나인 한옥으로 세상에 없던 걸 만들어 먼 미래에까지 그 가치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

줄자 들고 다니는 회장....18채 직접 설계

물리학을 전공한 조 회장은 10년 전 사재를 털어 '제대로 된 한옥'을 짓기로 했다. 그에겐 어릴 적 한옥에 대한 추억같은 건 없다. 영월엔 연고도 없다. 지난 시간 대부분을 해외 출장으로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한옥에 빠져들었다.

"20년 넘게 사업하면서 1년에 2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어요. 유럽, 가까이 일본만 해도 가장 오래 남는 문화유산이 건축이었죠. 그 중에서도 오래된 집을 보존하는 문화가 부러웠습니다. 200~300년 된 집이나 고성은 물론이고 몇 천년 전 무덤 위에 집을 지은 채 그대로 호텔로 바꾼 곳도 많았죠. 도시의 랜드마크들보다 그런 것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실험하기를 즐기는 조 회장은 '더한옥'을 모두 직접 설계했다. 주머니에 늘 줄자를 들고 다녔고,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골프용 거리측정기를 손에 잡고 건축의 황금비율을 익혔다. 이탈리아 건축물들이 왜 아름다운 지를 책이 아닌 현장에서 배운 셈이다.

영월에 터를 잡게 된 건 약 10년 전. 높이 70m의 기암이자 자연유산 '선돌'에 여행을 왔을 때다. 선돌에 오르자 어머니 품에 둥글게 안겨있는 지금의 더한옥 부지가 눈에 들었다. 땅을 매입하고 허가를 받기까지 수년이 걸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원시림과 같은 드넓은 땅, 강이둘러싸고 있어 육지이면서도 독립된 섬처럼 느껴지는 이곳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내겠다고 결심했다.

7년간 나무에 뜸을 들이다... 불가능, 불편함과 싸운 10년

"한옥이 왜 불편한가, 그 불편함을 어떻게 없앨까가 관건이었어요. 한옥이 외면받게 된 이유는 대부분 '재료'에 있었습니다."

지난 10년은 재료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험의 연속이었다. 강원도 육송과 금강송 등 토종 소나무 목재엔 수분이 많다. 제대로 말려 집 짓기 좋은 상태로 자연 건조하려면 최소 7~10년이 걸린다. 그러지 않고 대충 말려 사용한 나무집은 곧 틀어지고, 갈라지고, 곰팡이가 생긴다.

나무를 대체할 싸고 단단한 건축 자재들이 셀 수도 없는데, 누가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목건축을 할까. 조 회장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최소 7년이 걸리는 토종 소나무 건조 작업을 조 회장은 2년으로 단축했다.
그의 무기는 기술이었다. 나무를 어떻게 빨리 완벽하게 말릴까 골똘히 생각하다 '마이크로웨이브 시스템'을 떠올렸다. 전자레인지를 돌리면 물분자 운동이 시작돼 수분을 밖으로 배출되는 현상을 나무 건조에도 적용했다. 이 기기로 먼저 말린 나무는 겉면으로 배출된 수분만 2년 정도 더 자연 건조하면 된다. 나무 건조 기간이 7년에서 2년으로 줄어든 것. 이 기술은 현재 특허를 출원하고, 수출도 했다.

"잘 말린 나무는 돌보다도 단단합니다. 못도 끌도 들어가지 않고 튀어나올 정도에요. 더한옥에 쓴 자재는 문화재 복원의 기준인 목재 속 수분 함유율 25%보다 더 낮은 15%정도입니다. 굳이 왜 토종 소나무를 썼냐고요? 물도 많고 옹이도 많지만, 그 빛깔은 세계 어떤 목재보다 압도적으로 아름답죠."

대목장 18명과 동고동락 …알록달록 기와 눈길

최상의 재료를 최고의 목수들에게 맡겼다. 국내 대목장은 약 30명. 그 중 18명을 섭외했다. 처음엔 "안됩니다"는 소리만 귀가 따갑게 들었다. 통상 대목장은 큰 그림만 잡은 뒤 칠 등의 자잘한 일은 모두 일반 목수들이 분업하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잘 말린 나무를 가져왔으니 작업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했어요. 주말마다 영월에서 같이 나무 말리고, 지붕에도 같이 올랐더니 다들 마음을 열고 이제 모두 '모험가'가 됐어요. 같이 가구와 작품을 만들고, 컴퓨터 프로그램도 모두 능숙하게 다루게 됐죠."
더한옥 안엔 기존의 한옥에선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한옥이 과거의 시간에만 머물지 않도록 본질은 살리되, 편의성은 과감하게 살렸다. 독일 기술로 만든 투명 모기장은 한옥의 창문을 열어도 해충을 들이지 않고 바깥 경치를 즐길 수 있게 했다.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게 온도를 맞추기 위해 지붕 구조물 사이 독일산 단열재를 쓰고 뉴질랜드산 양털을 채워넣었다. 욕실엔 히노끼 욕조가, 복도에도 단차를 두어 다채롭게 바깥 풍경을 즐기며 거닐 수 있다.

더한옥의 소문을 들은 다른 목수들은 요즘 들썩인다. "앞으로 지어질 나머지 16채의 한옥 프로젝트에 꼭 참여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남대문 복원을 했던 정태도 대목장은 더한옥에 와 "드디어 내 평생 꿈꿔왔던 한옥을 봤다"고도 했다.
눈이 좋은 사람들은 기왓장만 보고도 조금 다른 것을 눈치 챈다. 기와가 일반적인 먹색만이 아닌 울긋불긋한 벽돌색의 기와와 뒤섞여 있다. "자연의 빛을 닮은 기와를 쓰고 싶었습니다. 기와 업체를 어렵게 설득해 굽는 온도와 시간을 다 달리해 여러 빛깔의 기와를 제작했어요."
이 공간을 빛나게 하는 건 그가 직접 만들거나 디자인한 가구, 그리고 국내 작가들의 미술품이다. 잘 지은 건축물을 서로 더 빛나게 할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조 회장은 7년 전 '아트마이닝'이라는 신진작가 발굴 및 전시 기획 플랫폼도 만들었다. 다음 달 공식 개장하는 두 채의 '영월 종택'에는 김선형, 이세현, 최영욱, 배세진, 황승우, 전아현, 권중모 등의 작가 작품이 전시돼 있다.


더한옥에 투입된 예산은 총 1800억원. 아무리 '좋아서 한 일'이라지만 비즈니스로서의 성공 가능성이 궁금했다.
"국민소득 3만불을 넘어가면 자본 중심에서 문화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패러다임이 이동합니다. 내가 머무는 공간, 그것을 채우는 콘텐츠, 문화와 여가 생활에 모든 소비가 집중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지요."
더한옥은 앞으로 석정원, 영월루, 선돌정, 회랑 등 각각 다른 설계도의 16채가 더 지어진다. 50%는 일반 호텔로, 50%는 회원제 리조트로 운영할 계획이다. 해외 귀빈들에게도 자신있게 자랑하고 싶은 공간으로 만드는 게 그의 목표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개척해온 그이기에 해외 진출할 계획도 있는 지 조심스레 물었다.

"뉴욕과 파리에 '더한옥'을 영월에 지은 방식 그대로 짓는 방안을 한 펀드와 논의 중입니다. 대목장도, 기와도, 우리 나무도 함께 해외에 진출한다고 생각하니 이미 설렙니다."

한옥을 짓는 과정에서 안타까운 일은 '기술자, 목수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50대 이하의 대목장은 찾기가 어려웠다.

"미국의 목재 건축회사들도 보를 세우고, 서까래를 쌓는 등의 한옥 건축기술에 깜짝 놀라고 가더군요. 오랜 세월을 거쳐 전수되어온 고도의 기술이 사라지지 않도록, 첨단의 기술과 아이디어를 접목해 세계에서 놀랄 만한 건축 유산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영월=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