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문닫은 마가린 공장에서 찾았다, '예술의 해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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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혜원의 파리통신베를린의 중심부에 위치한 KW는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2년 후 마가린을 생산하던 폐공장이었던 곳을 현대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곳이다. 이곳은 여느 미술관들과는 다르게 소장 컬렉션 없이 매번 다양한 전시가 1,2,3 층으로 나뉜 구조를 따라 열리며 층마다 각각 다른 작가의 작업들을 소개하고 있다.
베를린 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기획전시 리뷰
Enrico David - Destroyed Men Come and Go
Emily Wardill - Identical
1층에 전시된 엔리코 다비드의 작업들은 시멘트바닥과 하얀벽의 다소 차가운공간과 사람의 형태를 한 조각들이 나른한 조화를 이루며 설치되어 있는데, 관객들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조형의 위트있는 변형에서 은유의 의미를 찾게 된다.엔리코 다비드 - 무제 (2019) / Pietralacroce (2019)
이 점이 몹시 흥미롭다. 공간에 설치된 거울의 역할은 그곳에 있는 모든 존재를 반사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각-그것을 보는 자기자신-그 옆에 숨겨져 있던 다른 존재의 순서로 관람을 하게 된다. 문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다리 바로 옆에는 왁스와 석고로 만들어진 세개의 얼굴들에 달팽이 패각들이 붙어 있는데, 그 존재를 겨우 알아차릴 만큼 낮은 공간에 웅크려 있는 이 작업은 마치 패각 사이로 이러한 얼굴들이 비집고 나오는 듯 고요하면서도 달팽이와 같은 작은 존재의 이미지적인 팽창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이처럼 작가는, 구체적으로 작품에 대한 각주를 달기보다는 그 형태와 공간의 조화, 의도된 설치로 작은 힌트를 남기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게끔 하고 있다.엔리코 다비드의 조각들 중 또하나 주의깊게 보게 된것은 바로 작품들이 보여주는 느즈막한 운동성이다. 그 형태는 멈춰있지만 시각적으로 팽창하거나 확장되거나 뻗어나가는 듯한 시각적 환상을 겪게 한다. 거대한 트라이앵글의 진동의 육중함을 느끼게 하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얼굴이나, 무수한 선의 곡선 흐름속에 누워있는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스며드는듯 하는 것처럼 말이다.조각들은 따로 따로, 어떤 거리감을 두고 설치되어 있지만 모두 아랫쪽을 향한 채 각각의 방향으로 천천히 미끄러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언젠가 바닥으로 반쯤 파고들거나, 그림자와 같은 연결고리로 이어져 깊은 울림의 음을 만들어낼듯 그 무게감이 느껴진다.엔리코 다비드 - Destroyed Men Come and Go 설치전경
전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상은 identical 하게 비슷한, 닮아있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들의 연속과 그리고 그 안과 밖에서의 분할, 파장을 다루고 있다. 상상된 이미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에밀리 워딜의 이번 전시는 이와 같은 이미지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 우리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를 196,70 년대에 개발된 멀티미디어, ‘확장된 영화’의 몰입형 동영상 설치 작업을 통해 청중들이 직접 느낄 수 있게 한다.에밀리 워딜 - Identical ,16 분 비디오 반복 상영 (2023)
테이프를 감았다 푸는것처럼 리플레이되는 영상들은 단연코 의미를 한 눈에 파악하기 쉬운 이미지들은 아니다 . 우리는 이로써 이미지의 뒷면에 숨어 있는 것을 이해하고, 알고 싶어하는 본능을 깨우게 된다. 성적 쾌락과 신체적인 폭력의 제스처, 상징적인 영화의 한 순간과 다이버의 관계성, 한 단어를 두고 생긴 두개의 이미지, 한 장면이지만 둘로 나뉘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분할과 병합의 춤. 나뉘기도, 합쳐지기도, 닮아가기도 하는 이미지들은 끊임없는 화면의 전환을 통해 어떤 질문들을 끌어낸다. 누가 쾌락을 지배에 엮었는지, 왜 운율이 이유가 되어 납득이 되는지, 희극과 비극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마찬가지로 성스럽게도, 혼란스럽게도 느껴지는 음악 또한 그 일부이다. 피보나치 수열을 따라 8인 합창단의 목소리가 겹치고, 샘플링되고, 복제되며 탄생한다. 처음에는 한명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 후 두명의 목소리가 되어 공간을 만들며, 세명, 다섯명, 여덟명, 마지막에는 열세명의 목소리까지 마치 세포의 분열처럼 늘어나며 광활한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이 설치에서 빠질 수 없는 또하나의 요소는 바로 전시를 보는 관람객이다 . 작품 앞에서 관람객은 이중적으로 존재한다. 시각적인 이미지들을 보는 동시에 인식하며 개인적 경험, 지식 등으로 해석하여 또 다른 의미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영화관처럼 화면을 제외하고 모든 공간이 암전되며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과는 다르게, 화면 안의 공간과 화면 밖 공간을 분리해 이미지들을 두고 그 앞에서 움직이는 ‘몸’이 된다. 부드러운 파도처럼 밀려오거나 기차처럼 달려들기도 하는 사운드에 의해 한 화면의 이미지 안으로 몰입했다가 , 다시 밖으로 나와 그 옆의 다른 화면에 시선을 온전히 빼앗기기도 한다. 이중성 또는 다중성을 가진 이미지의 확장이 우리가 되는 것이다.
이번 두 전시에서 이미지의 확장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이미지는 네모의 틀에만 갖혀 있지않고, 우리에게 닿으려 스스로를 확장한다. 우리는 이미지에게 응답함으로써 그 의미를 파고들며 그를 받아들이려 한다. 각각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이미지는 또다시 분열한다. 이미지는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라는 것을 이미지는 조용히 외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