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역사의 아름다운 이정표 '뿌리깊은 나무'를 아시나요

[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 한창기 발행 / 월간 《뿌리깊은 나무》 / 1976년 3월 창간호~1980년 8월 폐간호(통권 53호)

특별전을 통해 되살린 《뿌리깊은 나무》에 대한 기억

올해 3월부터 5월까지 처음책방에서는 [《뿌리깊은 나무》 특별전]을 열었다. 그동안 모은 《뿌리깊은 나무》 관련 자료들을 한자리에 펼친 전시회였다. 발행인 한창기(韓彰琪, 1937~1997) 선생 26주기를 맞아 기획한 이번 전시회에서는 1970년대 창간되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지식인 교양지 《뿌리깊은 나무》 전권(창간호~폐간호)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구술사(口述史)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평가받는 《민중자서전》 시리즈 20권 전체, 국내 최고의 인문지리지로 손색이 없는 《한국의 발견》 시리즈 11권 전체가 다시 독자들을 만났다. 아울러 발행인 한창기 선생의 우리 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 전집]과 [단가], [해남 강강술래], [한반도의 슬픈 소리] 등 귀중한 LP 수십 장 및 해설집 또한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회에 대해 《뿌리깊은 나무》편집장을 지낸 김형윤 씨(김형윤편집회사 대표)는 “잡지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 전용과 함께 그 나름의 성깔이 뚜렷했다. 한국인의 삶,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옛날과 지금을 오가며 고집스럽게 기록한 매체이다”라고 회고했다. 또, 《뿌리깊은 나무》 기자를 지낸 배우 김명곤 씨(전 문화관광부장관)는 발행인 한창기 사장과의 인연에 대해 회고하면서 “1974년부터 시작해서 1978년까지 약 100회 동안 계속된 판소리감상회는 한창기 사장이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는, 참으로 획기적이고 대담한 기획이었다. 그런 탁월한 안목과 기획력 덕분에 주옥같은 음반들이 여럿 만들어질 수 있었다”면서 “발행인 한창기는 여느 국어학자보다 뛰어난 재야 국어학자였고, 안목이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였고, 전통문화의 부활을 이끈 문화운동가였다”고 추모했다.
사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배경에는 1970년대 지식인과 의식 있는 시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뿌리깊은 나무》에 실린 표지 이미지와 본문기사를 되살려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그 의미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고나 할까. 또, 발행인 한창기 선생의 우리 문화에 대한 안목이야말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뒤섞여 이래저래 혼란한 세상을 환기시켜 줄 시원한 바람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뿌리깊은 나무》는 1976년 3월 토박이 민중문화를 지향하며 한창기 선생이 창간한 월간 종합교양지이다. 창간사에서 “역사의 물줄기에 휘말려 들지 않고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해서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주는 창조의 일을 문화 쪽에서 거들겠다.”고 잡지의 나아갈 길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발행 취지는 전통의 규범문화에 치이고, 외래 상업문화에 밀린 토박이 민중문화에 물길을 터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거들기 위해서였다. 1976년 3월에 창간해서 1980년 8월호(통권 53호)를 끝으로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사회정화라는 명목으로 폐간되었다. B5판(사륙배판) 크기로 그때까지 발행된 우리나라 잡지 중에서는 최초로 순한글 가로쓰기를 단행했으며, 면수는 180면 안팎이었다. 특별히 매호마다 표지에 실린 사진이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진 한 장으로도 얼마나 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 보여준 신선한 시도였다.

편집진은 쉽고도 수준이 높은 글, 민중에게 ‘지식의 열등감’을 주지 않고 ‘앎의 즐거움’을 주는 글들을 싣기 위해 노력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편집방침은 우리 고유문화 전통의 맥을 지키며, 사회의 발달과 변천에 맞추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문화를 찾아내는 한편, 유럽이나 미국식의 편집체제를 지향했다. 외국의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우리와 관계가 없으면 싣지 않는다는 주장을 지켰다. 다달이 실리는 예술비평(음악·미술·무용·연극·영화·문학)·대중문화비평(신문·방송·광고·출판)·서평(매달 출판되는 것 중 두 권을 고름)은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또한, 잡지 발행과는 별도 판소리감상회를 마련하여 매주 한 번씩 직원과 독자들에게 우리 문화의 정수를 선물했다.특히, 우리말이 일본말로 동화되고 있는 현실(‘철공소’가 되어버린 ‘대장간’, ‘식당’이 되어버린 ‘밥집’, ‘양조장’이 되어버린 ‘술도가’, ‘서점’이 되어버린 ‘책방’, ‘정종’이 되어버린 ‘청주’ 등)에 대한 발행인의 고민과 우리말의 쓰임새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 있는 일본문화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아울러 《뿌리깊은 나무》는 1970년대의 정신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면서 문화사적 변혁운동의 주인공이었다.


구술사의 결정체 [민중 자서전] 시리즈와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시리즈

《뿌리깊은 나무》가 졸지에 폐간을 당했지만 편집진은 흩어지지 않고 남아 새로운 기획에 몰두한다. 먼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어 구술사(口述史)를 지향하며 만들어진 시리즈로 1981년부터 1991년 사이에 20권을 내었다. 이후 한국구술사연구회 등이 생겨났다. 다음과 같은 제목만 보아도 가히 우리 구술사의 결정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1권_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 : 제암리 학살사전의 증인 전동례의 한평생
2권_이제 이 조선 톱에도 녹이 슬었네 : 조선목수 배희환의 한평생
3권_어떻게 허먼 똑똑헌 제자 한놈 두고 죽을꼬? : 임실 설장구 신기남의 한평생
4권_이 계동 마님이 먹은 여든살 : 반가 며느리 이규숙의 한평생
5권_장돌뱅이 돈이 왜 구린지 알어? : 마지막 보부상 유진룡의 한평생
6권_베도 숱한 베 짜고 밭도 숱한 밭 매고 : 안동포 길쌈 아낙 김점호의 한평생
7권_나 죽으면 이걸로 끄쳐 버리지 : 남도 전통 옹기쟁이 박나섭의 한평생
8권_이부자리 피이놓고 암만 바래도 안 와 : 영남 반가 며느리 성춘식의 한평생
9권_시방은 안해, 강강술래럴 안해 : 진도 강강술래 앞소리꾼 최소심의 한평생
10권_옛날엔 날 사공이라고 혔지 : 천리포 어부 서영옥의 한평생
11권_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 명고 김명환의 한평생
12권_그때는 고롷고롬 돼 있제 : 벌교 농부 이봉원의 한평생
13권_대라 틀어라 박아라 : 아우라지 뱃사공 송문옥의 한평생
14권_사삼 사태로 반 죽었어, 반! : 제주 중산간 농부 김승윤의 한평생
15권_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알거든 : 가야금 명인 함동정월의 한평생
16권_여보, 우리는 뒷간밲에 갔다온 데가 없어 : 마지막 화전민 이광용의 한평생
17권_동래 사람은 팔만 올리도 춤이 덴다 캤어 : 동래 한량 문장원의 한평생
18권_밥해 먹으믄 바늘질허랴, 바느질 아니믄 빨래허랴 : 서울 토박이 부인 한상숙의 한평생
19권_칫다리 잡을라, 옹구 풀라, 밥해 묵을라 : 칠량 옹기배 사공 김우식의 한평생
20권_“에이 짠한 사람!” 내가 나보고 그라요 : 진도 단골 채정례의 한평생

또, 인문지리지로 손색이 없는 [한국의 발견_한반도와 한국사람] 시리즈는 서울·경기·강원·충북·충남·전북·전남·경북·경남·부산·제주 편 등 모두 열한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때까지의 자연·인문적인 상황을 요령 있게 정리하고, 책을 만들던 시점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특히 정성스럽게 담았다.
당시 이 시리즈의 편집 책임을 맡았던 김형윤 대표의 말을 빌리면 책의 뼈대는 ‘총론’편과 ‘각론’편으로 나누었다. 각 지방의 자연, 역사, 경제, 문화를 다루는 것이 총론이었다. 그리고 문화는 생활, 전통문화, 민속, 언어로 다시 나누되 그 지방의 특색에 따라 소재에 변화를 주었다. 각론은 도나 특별시 또는 직할시를 행정구역 단위로 쪼개어 각 지방의 내력과 문물을 다루는 것이었다. 다만 제주도는 행정구역이 단순하고 인구가 적은 만큼 총론으로만 책을 한 권 만들었다.“책 한 권에 실린 글의 분량은 2백자 원고지로 적게는 2천 장에서 많게는 3천5백 장, 열한 권 전체로는 3만 장이 조금 넘는 분량이었다. 80명의 필자가 이 글들을 나누어 썼는데, 총론은 지리, 경제, 문화, 언어를 비롯한 각 부문별 전문가들이 맡았고, 각론은 《뿌리깊은 나무》 편집기자 여덟 명에다 작가 한 명, 해직 신문기자 두 명이 썼다. 각론은 필자들이 해당 지역을 발로 누비며 사람과 문물을 대상으로 취재하고 관련 문헌들을 조사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또, “사진은 모두 2천 장 정도가 쓰였으며, 책에 실린 사진의 20% 정도가 동아일보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나머지 사진들은 한국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네 명을 포함한 스물세 명의 이태 동안 새로 찍고, 더러는 가진 것을 내놓기도 해서 만들어졌다. 한편 개화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쳐 찍혔던 옛 풍물을 담은 사진들도 정성길이라는 수집가의 손에서 나와 요긴하게 쓰였다.”고 한다. 물론 사진과 더불어 시각자료도 쓰였다. 각 권별로 해당지역 지도와 함께 인상지도, 여행지도, 조감도 같은 것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세 사람이 별도로 작업을 해서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김형윤 대표에 따르면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같이 이 책도 디자인 책임자는 이상철이었고, 한창기 씨가 또한 시시콜콜 간섭해서 그 ‘가지런주의’를 구현했다. 모든 지면을 원색으로 만들고 오프셋 인쇄를 했지만 글자는 사진식자를 버리고 납활자를 썼다. 사진식자로는 무엇보다 이 많은 지면이 요구하게 될 ‘교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쯤 되면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더불어 발행인 한창기 선생이 만들어낸 다양한 출판물들은 그 자체로서 우리 출판문화사의 새로운 이정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이후 우리 출판문화의 시대는 《뿌리깊은 나무》 창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뿌리깊은 나무》, 초판본과 창간호 수집의 계기가 되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서두에서 했던 말이지만, 1980년대 후반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처음 들어간 직장이 출판사였다. 그 무렵 서울올림픽 이후 더욱 달아오른 민주화 열기에 힘입어 출판 산업 또한 호황기를 맞아 무슨 책이든 내기만 하면 제법 팔렸는데, 무슨 연유인지 내가 편집을 맡았던 책은 상대적으로 판매 부진을 면치 못했다. 걱정도 병이라고 했던가. 혹시나 독자가 실망한 나머지 내가 만든 책을 벌써 헌책방에 내다 팔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며 청계천을 위시한 헌책방 거리를 기웃거리곤 했는데, 그때 거기서 이른바 ‘초판본’과 ‘창간호’ 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수많은 지식인 대중들을 독자로 두었지만,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던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를 발견하고는 설렜던 순간이야말로 그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같은 편집자였음에도 나로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편집디자인과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내공이 엿보이는 사진이며 도저한 문장이 즐비한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의 정체가 몹시도 궁금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모두 53권 전체를 모으리라 결심했다. 동시에 편집자로서 활자 및 이미지와 씨름하면서 첫 책을 내놓기 위해 노력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에 공감하면서 그런 열정들이 담겨 있는 초판본과 창간호에 나도 모르게 애정이 갔다고나 할까. 초판본과 창간호에 대한 수집벽은 바로 《뿌리깊은 나무》로부터 시작된 호사스런 취미였던 것이다.

작년 가을에는 아내와 함께 한창기 선생의 고향 인근에 자리 잡은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 다녀왔다. 전남 순천 낙안읍성 초입에 아담하게 지어진 박물관에는 한창기 선생이 평생 모은 다양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별도로 꾸며진 ‘한창기실’에는 생전에 즐겨 사용했던 만년필을 비롯해 육필원고와 옷가지 등이 전시되어 있어 소박했지만 고급스러웠던, 단순했지만 집념으로 점철된 그의 삶을 오롯이 전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박물관을 둘러보는 순간에도 나의 뇌리에는 “우리 책방에 《뿌리깊은 나무》와 관련 있는 자료들이 얼마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뿌리깊은 나무》 특별전]을 열어보리라 결심했다. 특별전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다시 《뿌리깊은 나무》 전권을 들여다보노라니,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의 안도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또 얼마 전에는 외국에서 일하거나 공부하고 있는 딸과 아들이 들어온 김에 가족여행 삼아 길을 떠나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그 길 위에서 문득 잊고 있던 생각을 추스려 전남 보성 벌교 인근에서 [뿌리깊은나무 재단]을 운영하며 도자기를 굽고 차밭을 일구고 있는 후손의 일터를 찾았다. 그곳의 지명을 따 ‘징광문화’라고 이름 붙인 그곳에서 힘겹게 한창기 선생이 남긴 뜻을 면면히 잇고 있는 그를 보며, 누군가는 잊었어도 누군가는 결코 잊지 않은 의미와 가치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까달았다. 나는 가끔 생각하는 그 무엇을 누군가는 매일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음을, 누군가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일이건만 또 누군가는 필생의 업(業)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았다.《뿌리깊은 나무》 창간사를 보면 발행인 한창기 선생의 절절한 마음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잡지 제호는 “우리 겨레가 우리말과 우리글로 맨 처음으로 적은 문학작품인 『용비어천가』”에서 따왔음을 밝히면서 “‘잘사는’ 것은 넉넉한 살림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도 누리고 사는 것이겠습니다.”라거나,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맞을 슬기를 주는 저력 – 그것은 곧 문화입니다.”, “문화는 역사의 꽃이 아니라 그 뿌리입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우리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라고 믿습니다.”, “조상의 핏줄이 우리 몸을 빚는다면, 그 몸을 다스리는 우리 얼은 우리말이 엮습니다.”, “환경은 문화의 집입니다.” 등등의 표현을 통해 그 마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알았을까,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거늘 그 펜이 단칼에 무뎌지고 말 줄이야. 하지만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귓전을 맴도는 다음과 같은 한창기 선생의 글과 말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오늘 다시 확인하게 된다. 《뿌리깊은 나무》는 절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좋은 꽃과 열매를 맺으리라는 믿음으로 굳건히 살아있을 것이기에.
중국의 고급문화에 휩싸였던 조선시대에도 토박이 예술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남에게 빼앗긴 시절에도 이 땅의 흙내음과 겨레의 얼을 잊지 않았던 예술이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고서 오늘에 이르는 사이에 속된 바깥 바람이 일고 상업주의가 번졌을망정 이 땅과 이 시대의 아들과 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어엿한 예술인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로 이런 예술을 뭇사람에게 접붙이려고 합니다.
<중략>
이러한 잡지의 구실은 작으나마 창조이겠습니다. 창조는 역사의 물줄기에 휘말려들지 않고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해서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주는 일이겠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그 이름대로 오래디 오랜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도 바로 이런 새로움의 가지를 뻗는 잡지가 되고자 합니다.
- 《뿌리깊은 나무》 창간사 마지막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