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 '순살 아파트'…황궁아파트 살아남은 자들의 '디스토피아'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주연 '콘크리트 유토피아' 리뷰

대지진으로 폐허된 도시 속 살아남은 아파트 한 동
공권력 비판, 재해 원인 배제하고 치밀한 심리변화에 집중
재난보다 더 무서운 '재난 앞의 인간군상'

주민대표 역 맡은 이병헌, 코믹으로 시작해 스릴러로 이끌어
연천 공터에 아파트 세트 짓고 4년간 공들인 작품

엄태화 감독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만들고 싶었다"
와르르, 다 무너졌다. 아파트 한 동만 빼고. 상상해보자. 내가 그 아파트에 사는 '운 좋은' 사람이라면, 혹은 무너진 옆동에서 겨우 목숨만 건진 '역시나 운 좋은' 생존자라면? 하루 아침에 잿빛이 된 도시, 구조대조차 없는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재난보다 무서운 건 재난 앞의 '우리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130분 동안 쉼 없이 이런 딜레마적 고민에 빠지게 하는 영화다. 재난 영화의 옷을 입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고도의 심리 스릴러이자, 코믹 느와르이자 극사실주의 공포 영화다. 장르를 규정할 수 없듯, 전개도 예측불허다. 장르를 넘나드는 연출은 감독과 배우에게 얼마나 위험한가. 다소 억지스럽거나, 정신 사납거나, 혹은 거북할 수 있다. 대체 뭘 봤는 지 모를 때도 많다. 하지만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등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배우들은 이 혼합형 장르를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뚫고 나온다. 폐허 속 아파트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치밀한 표정 연기와 완벽한 호흡으로 '연극적 연출'에 힘을 불어넣는다.
영화는 대한민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되어가는 과거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시작한다. KBS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의 일부다. 강남에 아파트가 생겨나던 시절과 아파트 추첨 장면, 아파트에 처음 살게 된 사람들의 인터뷰 등이 담긴다. 엄태화 감독이 "오프닝에 영화의 모든 걸 담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몇 분간의 짧은 영상만으로 이후 펼쳐질 장면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오프닝이 끝나면 장면은 대지진 직후의 첫날로 곧장 전환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 지, 구조대는 왜 오지 않는 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옆동, 인근 지역의 산 자들만 좀비처럼 황궁아파트 103동으로 모여들 뿐이다. 아파트 로비에 모인 생존자들끼리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을 두고 다툼을 벌인다.
아파트 입주민들은 회의를 연다. 주민이 아닌 외부인들을 '우리 아파트'에 살게 할 것인지 내쫓을 것인지 투표에 부친다. 하필 집밖은 강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 압도적 표차로 '외부인 출입금지'를 결정한 주민들은 매몰차게 이들을 몰아낸다. 때마침 불난 집의 불을 끄며 '의인'이 된 영탁(이병헌)은 주민 대표로 선출되고, 명화(박보영)와 신혼 생활의 단 꿈에 빠져있던 공무원 민성(박서준)은 영탁을 따라 방범대 반장을 맡는다. 모든 권력과 위계, 시스템이 '제로'가 된 상황에서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진다.


한국형 재난영화의 새로운 문법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첫 60분은 블랙코미디다. 엉겁결에 주민 대표가 된 영탁은 어수룩한 말투와 행동으로, 부녀회장을 맡은 금애(김선영)는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관객을 시종일관 웃긴다. 재난 상황이 아니어도 요즘 아파트 커뮤니티들이 외부인들에게 쌓아올린 여러 종류의 높은 장벽을 연상케 하는 장면에선 쓴웃음이 나온다.

"방범대는 세입자가 아닌 자가인 사람이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낡은 아파트에서 육교 하나 건너 황궁에 살려고 20년을 뼈 빠지게 일했다",
"(무너진)그 아파트 사람들 평소에 우리를 얼마나 무시했는데, 왜 도와야 하느냐"는 등의 대사가 그렇다.
영화의 후반부는 공포와 스릴러, 재난 블록버스터가 혼재한다. 모든 배우들이 영화의 전반부와 다른 얼굴을 하기 때문이다. 재난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한없이 선한 가장이었던 민성도, 똑부러진 리더십으로 사람들을 이끌던 금애도, 희생정신이 투철해 보였던 영탁도….

인물들의 심리 변화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기존 한국형 재난영화와 결이 다르다. 아파트(엑시트, 스위트홈)와 고시원(타인은 지옥이다)은 물론 터널 안과 바닷가(해운대), 기차 안(부산행) 등을 배경으로 했던 수많은 작품들이 가졌던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 희생자에 대한 연민과 보이지 않는 막연한 희망이라는 전형적인 문법을 과감히 덜어냈다.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건 "과연 나라면 저 상황, 저 입장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어쩌면 가장 본능적인 지점, 나의 생사와 안위를 걱정해야만 하는 현실적 상황에만 영화는 몰두한다. 쓸데없는 신파나 집단적 분노 대신 가장 사적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우리 안의 본성에 질문을 던지고, 공감을 얻는다.

스펙터클한 CG에 '인간다움'에 관한 질문을 더하다

2020년 한겨울, 서울 시내 중심의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사실 한여름에 찍었다. 연천의 공터에 3층짜리 아파트 세트장과 주차장을 짓고 촬영했다. 배우들은 "가장 힘들었던 게 가장 더운 날 패딩에 등산복, 방한복을 껴입고 촬영해야 했던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엄 감독과 은재현 CG슈퍼바이저는 서울 곳곳을 탐색하고 1만장이 넘는 사진을 보며 간판, 표지판, 가로등까지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공간의 제약은 디테일한 시각 특수효과(VFX)로 넘어섰다. 땅이 올라오고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들은 100개가 넘는 버전으로 시뮬레이션한 뒤 완성해 마치 실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됐다.
이 영화는 부실 아파트 전수조사가 시행되고 있는 시점에 개봉해 현실감을 더한다. 이병헌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등장했다가 눈이 뒤집힐 정도의 분노를 표출하는 역을 온전히 소화해내며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한다. 박지후, 김도윤 등도 주연 못지 않은 조연으로 빛난다. 장르적 재미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인간다운 일인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엔딩은 그 동안의 속도감에 비해 다소 느슨하고 뭉툭해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의 원작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주요 테마로 삼는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이다.

엄태화 감독은 지난 달 31일 기자시사회에서 "영화 찍기 전 스탭 모두에게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을 공유했다"며 "스페인 내전의 아비규환과 같은 장면과 분위기를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8월 9일 개봉. 15세 관람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