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화 감독 "콘크리트 유토피아, 피카소 '게르니카'서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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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화 감독 기자간담회“영화 찍기 전 모든 스탭에게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 이미지를 공유했어요. 스페인 내전의 상처를 다룬 그 그림이 주는 분위기와 메시지를 영화로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박해천의 로 아파트 역사 공부
인간의 본성과 재난에 대처하는 모습 '현재'에 대입
스페인 내전 때 참상 그린 피카소 '게르니카'서 영감
"나만 살 것인가, 모두 살 것인가 질문 던지고 싶었다"
지난 달 31일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엄태화 감독(41·사진)은 이렇게 말했다. 무너진 도시에서 살아남은 황궁아파트 103동 주민들과 인근 지역 생존자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 분열과 혐오로 얼룩져 아귀다툼을 하는 장면은 피카소의 역작 게르니카를 꼭 닮았다.
게르니카는 어떤 그림?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1937년 그린 비극적 대작이다. 전 세계가 긴 전쟁을 치르던 당시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가 나치 독일 공군기들의 폭탄 세례를 받고 폐허로 변했다. 당시 나치는 스페인 내전 중에 파시스트인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면서 곧 벌어질 제2차 세계대전을 위한 폭격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게르니카의 무고한 민간인 2000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피카소는 그 해 열릴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 전시관의 벽화 제작을 의뢰 받아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조국의 비보를 접한 피카소는 한 달 반 만에 폭 7.8m, 높이 3.5m에 이르는 대작을 완성한다.
이 그림은 폭격 자체를 묘사하지는 않았다. 말 아래에 짓밟힌 사람들, 목이 잘린 군인, 죽은 아이를 품은 어머니의 절규, 부러진 칼을 쥐고 있는 잘라진 팔 등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알린다.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표현하고,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들을 단순한 형태로 그린 뒤 흰색, 검정색, 회색, 황토색 등 애도의 뜻을 상징하는 색상만을 사용했다. 전쟁의 상황들을 상상하면서 더 큰 공포가 밀려오는 그림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화면 속 인물들과 화면의 톤 역시 전반적으로 무채색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박해천 교수의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영화의 제목으로
엄 감독은 이번 영화를 "한국에 갑자기 이런 재난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했다. 그는 또 "정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영화의 제목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어떻게 지은 걸까. 엄 감독은 "동명의 책, 박해천 교수가 2011년 쓴 인문교양서를 읽었다"고 했다. 원래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웹툰 원작을 재미있게 본 뒤 '한국의 아파트'를 더 공부하고자 하는 취지로 읽었다고."한국에서 아파트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 지 궁금했어요. 콘크리트는 아파트를,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 행복한 공간을 상징하죠. 그 두 단어가 붙은 게 아이러니컬하고 재밌었습니다. 이보다 더 이 영화에 적합한 제목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박해천 동양대 교수가 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에 관한 대서사다. 거주자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아파트의 시각 체제에 대한 연구, 한국 사회가 왜 아파트에 열광하는 지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한다. 아파트는 우리의 감각과 생활양식을 새로 구축하고, 신인류(신중산층)를 탄생시킨 주인공인 동시에 전쟁 후 베이비붐 세대가 다른 세대와 자신들을 '구분짓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게 책의 주요 내용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지만, 감독은 영화의 엔딩을 통해 유토피아로서의 가능성을 조금은 열어둔다.
"마지막 장면에 장소 전환이 있죠. 지옥 같았던 황궁아파트 밖에 정반대의 유토피아, 즉 완벽한 대안이 있었다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어요. 다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중에, '같이 살 방법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