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친구는 울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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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학교에 신고 간 노랑 고무신을 잃어버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서울 다녀온 아버지가 사다 준 노랑 고무신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검은색과 흰색 고무신만 보았던 나는 학교에는 신고 가지 말라고 어머니가 당부했지만 듣지 않고 이튿날 바로 신고 갔다. 아이들도 처음 보는 노랑 고무신을 모두 만져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 집에 갈 때 텅 빈 신발장을 보고서야 잃어버린 걸 알았다.
여자 친구가 되돌아와 같은 반의 남자아이를 지목하며 품에 뭔가 숨기고 수업이 끝나기 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걸 봤다고 알려줬다. 맨발로 집에 돌아온 나를 어머니가 심하게 나무랐다. 여자 친구가 귀띔해준 얘기를 하자 어머니가 나를 끌고 신발을 찾아 나설 때 들어오는 아버지를 만났다. 사정을 들은 아버지는 가지 말라며 내게 “그 친구가 가져간 걸 네 눈으로 본 게 아니면 의심하면 안 된다. 그 친구가 가져간 게 설사 밝혀지더라도 절대 내색하지 말라”고 엄명했다.그렇게 잊힌 노랑 고무신이 소환한 건 아버지다. 고등학교 다닐 때다. 고향 큰집에서 추석 차례가 끝나자 아버지가 불쑥 그 친구를 만나느냐고 물었다. 중학교 졸업한 뒤로는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전에 살던 옛집에 가보자고 앞장섰다. 옛집의 뒷담 구실을 하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한참 둘러본 아버지가 둔덕에 앉아 꺼낸 고사성어가 ‘송무백열(松茂柏悅)’이다. 중국 서진(西晉)의 문학가 육기(陸機)가 쓴 탄서부(歎逝賦)에 나온다. 그가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매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타자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고 쓴 데서 따온 말이다. 벗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 함께 축하해 준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고사가 생각나 여기 와 확인해보니 송무백열은 사실과 다르다. 잘 자란 소나무에 비해 잣나무는 잘 크지 못했다”고 했다. 두 나무는 모두 어릴 때 응달을 좋아하는 음수(陰樹)로 소나무가 좀 무성해 빛을 가려주면 훨씬 편하게 자란다. 좀 크면 소나무는 키 크고 잎이 많아 잣나무가 햇빛을 받기 어렵고, 뿌리가 더 깊이 자라는 소나무 때문에 잣나무가 물을 충분히 얻기 어렵다. 아버지는 “송무백열은 문학적으로 바람을 표현했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사람은 또래에게 가장 많이 배운다. ‘친구는 하는 데 난들 못할까’라는 시샘이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은근한 경쟁 관계다”라고 설명했다.
그날 말씀한 아버지의 교우관(交友觀)은 이랬다. ‘친구(親舊)’는 한자어 ‘친고(親故)’에서 왔다. 친(親)은 친척, 구(舊)는 ‘오랜 벗’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친척의 의미가 빠지고 ‘벗’의 의미로 한정해 쓴다. 벗은 ‘비슷한 나이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이다. 우리말 ‘벗기다’에서 유래했다. 친구는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성장한다. 유사성에 끌리고 친밀성에 사귀고 불변성에 마음을 주는 관계다. 그 관계는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는 마음인 시기심에서 비롯한다.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뇌 용량이 150명 정도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어 평생 150명의 친구를 사귄다. 200명을 사귀면 성공한 삶이라는 속설도 있다. 친구는 우리에게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다. 친구가 많을수록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친구는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질이 더 중요하다.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아버지 말씀은 계속됐다. “친구는 울타리다. 울타리는 안에서도 밖이 내다보이고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며 다만 경계의 역할만 하는 거다. 돌담처럼 막히지 않아야 한다”고 울타리에 비유해 친구를 정의한 아버지는 “울타리는 허술해도 상관없고 없어도 된다”고 단정 지었다. 아버지는 “사귀는 친구 중 보통 5~10명의 친한 친구를 사귄다. 오직 진정한 친구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사람이다. 서로 비밀과 약속을 지키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며 “진정한 친구를 직위, 학식, 빈부차를 벗어던진 ‘벗’이다”라고 한정했다. 벗은 ‘나 아닌 또 다른 나 속에 새로운 나’라고 엄격하게 규정했다.
아버지는 “나는 벗으로 여기지만, 친구는 나를 벗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격이나 기대치, 경험과 가치관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어 “그때 그 아이는 너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은 거다. 노랑 고무신은 떨어져 나간 울타리에 준 것 쯤으로 여겨라”라고 주문했다. 아버지는 유대인 격언을 인용해 결론지었다. “친구는 세 종류다. 음식 같은 친구에게 매일 빠져서는 안 된다. 약 같은 친구는 이따금 있어야만 한다. 병 같은 친구는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강한 시샘이 싹틔워 깊게 사귀는 우정은 손주들에게도 꼭 물려줘야 할 소중한 인성이다.<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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