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름다운 것은 집으로!" 티파니의 아들은 美의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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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새미의 공예의 탄생1837년 뉴욕에서 시작된 티파니 & Co.는 보석 장신구과 은제품 등을 취급하며 장인 정신과 고급 취향을 상징하는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7월의 칼럼, 티파니 & Co.의 19세기 박람회 출품 은공예 작품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 8월에도 유리 공예 관련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티파니의 유리 공예 사업은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 1848-1933)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는 누구이며, 왜 유리에 매료되었을까? 그는 어떤 방법으로 자기 아이디어를 실험했을까? 그리고 세기 전환기의 가장 미국적인 예술품 중 하나로 루이스 티파니의 성과를 언급할 수 있을까?
화가 또는 장식미술가?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는 티파니 & Co. 창업자 찰스 루이스 티파니(Charles Lewis Tiffany, 1812–1902)의 아들이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던 루이스 티파니는 청년기에 가족 사업에 참여하는 대신 자신의 예술적 관심사에 집중해 전업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 직후, 10대 후반의 루이스 티파니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후 미국 풍경화가 조지 이네스(George Inness, 1825–1894)1)에게 비공식적으로 그림을 배웠고, 이에 더해 아카데미 풍 프랑스 화가 레옹 샤를 베일리(Leon-Charles Bailly)에게 그림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기도 했다. 루이스 티파니는 1870년부터 1871년에 걸쳐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런던, 파리, 마드리드, 로마, 피렌체뿐 아니라 말라가, 지브롤터, 탕헤르, 몰타, 아말피,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등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연안으로의 장기 여행이었다. 마치 17세기 유럽의 귀족 자제가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났던 그랜드 투어처럼. 그중에서도 루이스 티파니는 모로코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그 영향을 그림으로 남겼다. 1872년 작 <아프리카 탕헤르의 뱀 부리는 사람 Snake Charmer>은 당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이국적 취향을 반영했던 유행과 일치해 주목받았다.
이 그림에는 루이스 티파니의 이슬람 건축과 장식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 백색 기둥 및 지붕의 형태와 같은 건축 요소는 1905년 지었던 자신의 저택, 로렐턴 홀(Laurelton Hall)을 포함해 그의 실내 건축 작업에 수십 년 동안 꾸준하게 등장했다. 또한 무어 장식 및 북아프리카 건축물에서 빛을 표현하는 방법 등은 이후 루이스 티파니의 유리 공예 프로젝트에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루이스 티파니는 30대 중반까지 사업가 아버지의 행보와는 별개로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룹전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에 다수의 작품을 출품하는 등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으며, 미술 협회 조직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수련 기간 부족 등의 이유로 30대 후반이 된 1870년대 후반부터는 회화 작업보다는 유리를 활용한 실내 장식 미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상을 위해 디자인된 생활환경에 예술적 재능, 색과 빛에 관한 감각을 반영”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설정했다. 또한 그는 “아름다움을 집으로 가져와서, 아름다움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삶의 미적 수준을 향상하기 위해”라며 삶에 영향을 주는 아름다움을 탐구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명확히 했다.
루이스 티파니는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의 창시자,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처럼 삶에 더욱 밀착된 예술가가 되는 길을 택했다. 다만 티파니는 산업화, 기계 생산, 그리고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모리스와 달리 시장과 최신 기술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루이스 티파니의 안식처 : 벨라 아파트(1878)와 로렐턴 홀(1905)
1870년대 뉴욕에는 점점 더 많은 아파트가 세워지고 있었다. 루이스 티파니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첫 번째 인테리어 디자인 프로젝트는 1878년 진행된 뉴욕 26번가의 신축 고급 주거지, 벨라 아파트(Bella Apartments)의 최상층 인테리어였다. 사실 벨라 아파트는 루이스 티파니 자신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그는 당시 결혼한 지 6년이 되었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본가에서 분가해 생활할 수 있는 독립적 주거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루이스 티파니는 가족의 안식처를 디자인하는 것 이외에 다른 계획도 있었다. 그는 아파트의 창, 텍스타일, 벽지, 조명, 가구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디자인했다. 그는 벨라 아파트에서의 실험을 통해 장식미술가로의 성공 여부를 타진하고자 했고, 그의 펜트하우스는 시제품 전시를 위한 모델하우스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현관의 장식 유리창은 다양한 색의 조합이 돋보이는 활기가 넘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했다. 유백색 유리를 직접 제조했을 뿐 아니라 유리 컷팅에 보석 컷팅 방법을 활용했는데 이는 동시대의 기술력을 적극적으로 적용한 결과였다. 또한 대담한 붓 자국을 남기는 실험적 제작 방식은 그의 청년기의 풍경화가로서의 경험이 드러난 결과였다.
루이스 티파니는 벨라 아파트 실내에 일본 공예품을 적극적으로 배치했는데, 이는 티파니 社에서 1877년 일본으로 장기 출장을 떠났던 영국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드레서(Christophher Dresser, 1834-1904)에게 구입을 의뢰했던 8000여 점의 일본 공예품 중의 일부로 추정된다. 통합된 예술 표현을 완성하려는 그의 열망은 전성기 1905년에 지었던 롱 아일랜드(Long Island) 저택 로렐턴 홀(Laurelton Hall)에서 절정에 달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최고의 이상으로 통합을 보여주었던 호화로웠던 로렐턴 홀은 예술 학교, 박물관, 스튜디오 및 휴양지의 역할을 했다. 즉, 이곳은 루이스 티파니의 궁극적 미적 이상을 표현한 곳이자 세계관을 구현하는 장소였다. 실내와 실외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디자인했고, 자연이 실내로 유입된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리셉션 등을 포함해 84개의 방이 있었던 로렐턴 홀의 실내 공간에는 식물이 무성했고, 모자이크 타일,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유리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실에는 네 부분으로 분리해서 제작했던 스테인드글라스 창 <사계 Four Seasons>를 설치했는데 이 작품으로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유리로 “그림을 그렸다” : 티파니 스테인드글라스
루이스 티파니의 예술성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재해석했던 유려한 색 유리창 작업에서 최고로 발휘되었다. 평면 판유리를 활용해 빛과 색을 표현했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제작 방법은 중세부터 크게 변화하지 않았는데, 루이스 티파니는 기술적인 발전에 도전 의식을 더해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마치 풍경화가가 캔버스에 겹겹이 물감을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서로 다른 질감, 두께 및 색상의 유리를 겹겹이 배치해 보는 각도에 따라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대형 색 유리창 작업에 관해 루이스 티파니 자신도 유리로 “그림을 그렸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루이스 티파니는 실험적인 제작 방법을 통해 더 풍부한 색조와 높은 밀도의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색 중에서 티파니의 색 유리창에 표현되지 않은 색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초반에는 종교적 장면을 선호했던 고객들이 많았지만, 자연광에 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흐르는 강물, 해 질 녘 혹은 새벽녘의 대기 등을 극적으로 표현했던 티파니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보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목련, 수선화 같은 미국 자생 식물 혹은 생명을 상징하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풍경 등을 표현했던 절정기 티파니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기술 혁신에 장인정신을 더해 자연을 매혹적으로 포착했던 중요한 작품이다.
루이스 티파니 스튜디오는 교회, 학교, 공적 건물 등 전국적으로 수많은 고객을 위한 공간을 디자인했다. 예를 들면 예일 대학,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Art Institute Chicago), 미국 전역과 멕시코, 캐나다 등의 100여 개 교회,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개인 주택의 인테리어, 나아가 21대 대통령 체스터 앨런 아서(Chester Alan Arthur, 1829-1886)를 위한 백악관 인테리어까지.2) 티파니를 원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손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의 ‘패브릴(Favrile)’ 유리
1892년 말경 루이스 티파니는 뉴욕 퀸스의 코로나에 티파니 유리 공장을 지어 스테인드글라스를 효율적으로 제작할 뿐 아니라 전문적인 예술 유리 제품도 생산하는 회사(Stourbridge Glass Co. 이후 Tiffany Glass Company)를 영국 출신의 유리 기술자 아서 나쉬(Arthur Nash, 1849-1934)와 함께 설립했다. 동시대의 신기술을 활용하는 실험적 디자인에 더 적극적이었던 그는 나쉬와 함께 다양한 색상의 유리를 뜨거운 상태에서 혼합해 장식적인 패턴 효과를 얻는 방법을 개발했다. 유리 기물 위에 색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은 표현은 열대 지역 조류의 깃털 혹은 열대 지역 식물을 닮았는데, 이는 시대의 유행과 결을 함께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더해 영롱한 유리 표면의 광택 효과를 얻기 위한 화학 실험도 이어졌다. 뜨거운 유리 표면에 염화철(iron chloride) 또는 염화주석(stannous chloride)을 분사했을 때, 유리가 매우 뜨거우면 무광택 무지갯빛이, 유리가 약간 식었을 때 분사하면 무지갯빛이 선명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시도 끝에 그들은 무지갯빛 광택이 은은하고 미묘하게 표현되는 유리 착색 기술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루이스 티파니는 이 유리 제조 기술에 손으로 만들었다는 뜻의 고대 영어 단어 패브릴(fabrile)에서 착안해 고유명사 ‘패브릴(Favril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894년 특허까지 획득했던 이 착색 기술은 루이스 티파니에게 최고의 아르누보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루이스 티파니는 이 금속성의 화려한 착색 기술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표면 처리 기법의 모방자들도 수없이 생겨났다.
티파니 걸스와 티파니 램프
1898년에 이르러 루이스 티파니는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을 접목한 조명 제작이라는 또 다른 모험으로 눈을 돌렸다. 루이스 티파니는 이러한 램프를 실내에 배치한다면 마치 풍경화를 소유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램프에는 잠자리, 등나무, 수선화, 튤립 등 곤충과 식물을 모티프가 등장하는데, 갓을 지지하는 받침 부분은 전등갓의 모티프와 긴밀하게 관련이 있는 형상을 투영했다. 예를 들어 연잎으로 구성된 수련 램프의 지지대는 습지를 연상시키는 잔물결을, 그리고 튤립이 피어 있는 꽃밭과 같은 램프의 지지대는 꽃잎을 모티프 삼아 청동 주물로 제작했다. 사실 티파니 램프 제작 초기에는 석유등으로 디자인되었다가 전기가 상용화되면서 전구를 끼울 수 있는 디자인으로 변화되었다. 석유등 제작을 위해서는 열과 가스를 방출하기 위해서 램프의 최상단에 환기 통로가 있어야 했지만, 전등으로 바뀌면서는 미적으로 더욱 완성된 형태로 디자인할 수 있었다. 전등갓을 만드는 과정을 쉽게 풀어 설명하면 3차원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과도 같았다. 이 제작 과정에는 장인적 노동이 꼭 필요했다. 일단 디자인이 승인되면 다양한 색상과 밀도를 가진 개별 유리 조각을 정해진 도면에 따라 일일이 수공으로 자르고 붙여야 했다. 사실 이 램프 제작 뒤에 크게 기여한 여성들이 있었다. ‘티파니 걸스(Tiffany girls)’로 불리던 여성들 중에 1892년부터 1909년 사이 근무했던 여성, 클라라 드리스콜(Clara Driscoll, 1861–1944)에 관련된 자료가 2007년 발견되었다. 유리 절단 부서(Women's Glass Cutting Department) 책임자였던 드리스콜은 티파니 램프 제조에 있어 중요한 여성 관리자이자 디자이너 중 하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 기혼 여성이 집 밖에서 임금 노동을 거의 하지 않던 시절, 티파니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여성 공예가의 존재는 매우 특별했다. 기록에 따르면 1897년까지 유리 작업장에는 40~50명의 젊은 여성들이 일했고, 드리스콜의 주급은 35달러로 남성 공예가들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루이스 티파니는 소위 예술성과 기술력을 겸비한 에너지 넘치는 작품으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최초의 미국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과 패브릴 유리는 국제 박람회에 전시되었고, 프랑스 화상 지그프리드 빙(Siegfried Bing)의 장식미술품 갤러리 아르누보(L'Art Nouveau)에서도 티파니 스튜디오의 유리 공예 제품을 취급하면서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루이스 티파니는 1899년, 런던의 법랑 세공 기법을 도입해 제품을 개발했고, 곧이어 미국에서 도자기 그릇의 인기가 높아지자 도자기 공장을 여는 등 사업을 계속해서 확장했다. 1902년 아버지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세상을 떠나자, 루이스 콤포트 티파니는 자신의 사업을 티파니 스튜디오(Tiffany Studios)로 통합하고, 티파니 社((Tiffany & Co.)에서 디자인 디렉터로 일하기 시작했다. 1919년까지 17년 동안 티파니 社에서 일하며 그는 장신구를 담당하는 새로운 부서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식물과 곤충이 유기적으로 배치된 자연주의적 예술 장신구를 선보이는 등 유리 분야에서 성취했던 요소를 반영하고자 했다.
티파니 스튜디오의 제품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티파니 社와는 별도로 운영되었다. 사실 티파니 스튜디오의 주요 프로젝트는 미국의 신흥 부호 및 교회, 학교 등의 기관에 인기가 있었지만,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개인 재산을 회사 운영에 지속적으로 투입해왔던 것이다. 루이스 티파니 스튜디오는 1929년 10월, 미국 주식시장 폭락과 이어진 경기침체를 피해 가지 못했다. 1932년 4월, 티파니 스튜디오는 파산을 신청했다. 청원서에는 자산보다 많은 부채가 기록되어 있었다.
1933년 1월 루이스 티파니는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려했던 로렐턴 홀에 있던 예술품들은 1946년 경매로 새 주인을 찾아갔고, 로렐턴 홀과 관련 부동산도 1947년부터 매각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로렐턴 홀은 1957년 대형 화재로 상당 부분 소실되었고, 현재는 훼손되지 않았던 건물의 일부만이 플로리다에 위치한 찰스 호스머 모어스 미국 미술 뮤지엄(The Charles Hosmer Morse Museum of American Art)에 소장되어 있다.
루이스 티파니의 일생은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움을 삶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실험을 모두 다 해보지 않았을까. 동시대 최고의 미학적 기술을 개발했고, 장인적 기술을 통해 다채로운 자연광과 인공의 빛을 인류에게 선물했다. 그의 저택은 더 이상 있던 자리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의 전설적인 작업은 뮤지엄이라는 시간을 유예해 주는 특별한 장소에서 연장된 삶을 살고 있다.
1) 조지 이네스는 종종 "미국 풍경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독창적이고 독특한 미국 스타일을 보여주는 풍경화로 알려져 있다. 신학의 영향이 그의 그림에 드러났는데 자연의 모든 것이 영적인 것과 상응하는 관계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2) 1902년,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가 백악관을 연방 스타일로 재정비하면서 티파니 스크린과 빅토리아풍의 실내 장식물은 모두 철거되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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