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우리 아파트만 멀쩡하다면
입력
수정
지면A26
콘크리트 유토피아와르르, 다 무너졌다. 아파트 한 동만 빼고. 상상해보자. 대지진으로 온천지가 무너졌는데 내가 달랑 하나 남은 그 아파트에 사는 ‘운 좋은’ 사람이라면, 혹은 무너진 옆 동에서 겨우 목숨만 건진 ‘역시나 운 좋은’ 생존자라면. 하루아침에 잿빛이 된 도시, 구조대조차 없는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공포와 코미디 섞은 '재난 영화'
이병헌·박서준 연기도 볼 만
‘콘크리트 유토피아’(사진)는 130분 동안 쉼 없이 이런 고민에 빠지게 하는 영화다. 재난 영화의 옷을 입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도의 심리 스릴러이자, 코믹 누아르이자, 극사실주의 공포 영화다. 장르를 규정할 수 없듯 전개도 예측불허다. 장르를 넘나드는 연출은 감독과 배우에게 얼마나 위험한가. 하지만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등의 배우는 이 혼합형 장르를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뚫고 나온다.영화는 대한민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돼가는 과거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시작한다. 강남에 아파트가 생겨나던 시절과 아파트 추첨 장면, 아파트에 처음 살게 된 사람들의 인터뷰 등이 담긴다. 엄태화 감독이 “오프닝에 영화의 모든 걸 담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몇 분간의 짧은 영상만으로 이후 펼쳐질 장면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오프닝이 끝나면 장면은 대지진 직후의 첫날로 곧장 전환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구조대는 왜 오지 않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리고 아파트 입주민들은 회의를 열어 외부인 출입금지를 결정한다. 영탁(이병헌 분)은 주민 대표로 선출되고, 명화(박보영 분)와 신혼 생활의 단꿈에 빠져 있던 공무원 민성(박서준 분)은 영탁을 따라 방범대 반장을 맡는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첫 60분은 블랙코미디다. 엉겁결에 주민 대표가 된 영탁은 어수룩한 말투와 행동으로, 부녀회장을 맡은 금애(김선영 분)는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관객을 시종일관 웃긴다. 재난 상황이 아니어도 요즘 아파트 커뮤니티들이 외부인에게 쌓아 올린 여러 종류의 높은 장벽을 연상케 하는 장면에선 쓴웃음이 나온다.영화의 후반부는 공포와 스릴러, 재난 블록버스터가 혼재한다. 한없이 선한 가장이었던 민성도, 똑부러진 리더십으로 사람들을 이끌던 금애도, 희생정신이 투철해 보였던 영탁도 모두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이병헌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등장했다가 눈이 뒤집힐 정도의 분노를 표출하는 역을 온전히 소화해내며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한다. 박지후, 김도윤 등도 주연 못지않은 조연으로 빛난다.
장르적 재미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인간다운 일인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엔딩은 그동안의 속도감에 비해 다소 느슨하고 뭉툭해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의 원작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주요 테마로 삼는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이다.
엄 감독은 지난달 31일 기자시사회에서 “영화를 찍기 전 스태프 모두에게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을 공유했다”며 “스페인 내전의 아비규환과 같은 장면과 분위기를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오는 8월 9일 개봉. 15세 관람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