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 줄무늬의 멋…피카소와 샤넬, 왜 '죄수복'을 사랑했나

[arte]한국신사 이헌의 스타일 인문학
1950년 브레통 셔츠를 입은 파블로 피카소의 모습 일러스트
누군가에겐 파블로 피카소를, 누군가에겐 코코샤넬을 또 누군가에게 장폴 고티에를 떠올리게 하는 줄무늬 셔츠. 어쩌면 베레모와 함께 가장 프랑스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대변하는 브레통 셔츠는 명징하고 시원시원한 이미지로 패션 디자이너들은 물론 옷 애호가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아이템이다. 동시에 이보다 더 아이코닉 할 순 없다는 면에서 결코 넘지 못할 산으로 여겨져 왔다.

10년전쯤 추성훈 선수가 자신의 딸 사랑이를 안은 채 서로 다른 컬러의 브레통 셔츠를 입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을 보았을 때, 이 경쾌한 줄무늬 티셔츠를 향한 사랑이 한 없이 깊어졌음을 고백한다.
소외 받고 외면 받던 줄무늬, 계층적 혹은 사회적 선 긋기를 위한 수단이 어떻게 멋을 추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신분상승(?)을 이뤄냈는지 함께 알아보자.
Audrey Hepburn, 1954. Photo by Alamy.

얼룩말의 그것, 횡단보도와 죄수복 패턴이 되다

아프리카의 드넓은 초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동물은 무엇일까? 의문의 여지 없이 얼룩말이다. 흑백의 또렷한 줄무늬는 먼 곳에서도 쉽게 포착된다. 도심의 횡단보도가 얼룩말의 무늬를 차용한 것은 안전을 위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시각적 효과는 일찌감치 죄수들에게 적용되었다. 탈옥에 성공한 경우 도주를 막는 효과는 물론, 가로줄무늬의 죄수복이 세로로 늘어진 창살과 교차되면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심리적 압박에도 활용됐다는 설도 있다. 탈옥한 죄수를 사회로부터 재빨리 감옥으로 되돌려 보내는 기능은 실수로 바다에 빠진 소중한 선원을 갑판 위로 다시 되돌려 보내 소중한 생명을 구하는 데에도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1858년 프랑스의 해양부 장관, 페르디낭-알퐁스 아물랭 제독은 법령을 통해서 휘하에 있던 프랑스의 모든 선원들에게 하얀색 바탕에 21개의 푸른색 줄무늬가 있는 목이 넓은 티셔츠를 착용하도록 명령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21개의 푸른 줄무늬는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해전에서 일궈낸 21번의 승리를 의미하는 숫자다. 아물랭의 상관이었던 나폴레옹 3세를 향한 아첨과 전장의 병사들에 대한 사기 진작, 생명 보호라는 명분을 동시에 일궈낸 일석삼조의 의미심장한 디자인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 유니폼의 디자인은 시각적인 효과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트넥이라고 불리게 된 널찍한 목 부분, 짧은 7부 소매로 고안되어 물에 빠진 선원이 (아직 의식이 있다면) 쉽게 벗어 마치 깃발처럼 사용해 본인의 위치를 알리는 데 유용했다. 의식이 없는 경우라도 재빨리 발견해 건져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적 측면도 있었다.
Coco Chanel at her home, Villa La Pausa in Roquebrune, in the French Riviera with her dog, Gigot, circa 1930. Photo by Alamy.

코코 샤넬의 가로 줄무늬, 자유의 상징이 되다

이렇게 신박한 디자인을 안전 장비도 별로 없이 일하던 당시 어부들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프랑스의 해군 본부가 위치한 브레따뉴(Bretagne) 지역의 어부들과 그 지역의 양파를 해외로 수출하던 항구의 양파 상인들을 중심으로 ‘생명을 구하는 편리한 작업복’이 됐다. 품질 좋은 브레타뉴 양파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소외된 하층민의 유니폼이 됐다. 그렇게 브레통은 또다시 소외 받고 외면된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을 구분하는 ‘또렷한 줄긋기의 수단’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이 유니폼은 장교가 아닌 갑판이나 배의 하부에서 생활하는 하급 장교와 일반 병사에게 지급된 것이었다. 사관학교를 통해 장교가 된 이들은 갑판 병에서 진급하는 장교들을 천대하면서 얼룩말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 천하고 보잘것 없는 줄무늬 셔츠는 코르셋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킨 자유주의자 코코샤넬에 의해 모두가 사랑하는 고귀한 존재로 신분상승을 꾀하게 된다. 1912년 브레따뉴에서 멀지 않은 항구도시 도빌(Deauville)에 정착한 샤넬은 바닷가에서 자주 목격되던 줄무늬 작업복을 보면서 영감을 얻게 된다. 1917년 맞춤복 컬렉션에 오리지널 브레통 셔츠를 변형한 짧은 셔츠를 도입했다. 여성의 자유를 위한 중성적 매력의 브레통 셔츠를 오늘날의 위치로 끌어올린 결정적 순간이었다.
앤디 워홀이 입었던 브레통 셔츠.
1930년대엔 급기야 본인이 죄수와 바다노동자들이 입던 줄무늬 니트 티셔츠를 착용하고 바캉스를 즐기면서 당시의 영향력 있던 문인과 화가 그리고 셀러브리티들에게 편안함과 자유를 선사한다. 본격적이고 완벽한 브레통 셔츠의 신분상승이 이뤄진 것이다.


가로 줄무늬는 뚱뚱해 보인다는 착각

여성들이라면 물론이거니와, 멋내기에 관심 많은 남자들이라면 꼭 한 두벌은 가지고 있을 이 가로 줄무늬 옷. 뚱뚱해 보인다는 항간의 오해는 그저 오해일 뿐이다. 1867년에 이미 독일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에 의해 세로 줄무늬 보다 가로 줄무늬가 더 길어 보이게 하는 착시효과가 있음이 발표됐다. 선대 학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수행된 2011년 영국 요크 대학의 피터 톰슨 박사의 연구 결과 역시 “수평 줄무늬가 당신을 결코 더 뚱뚱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Training of officers and cadets of a french ship on the River Thames, London, England 1935. Photo by Getty.
이쯤 되면 당신을 돋보이게 하며, 심지어 더 날렵하게 보이게 만들어줄 가로 줄무늬 셔츠, 구구절절한 역사를 가진 브레통 셔츠를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올 여름, 너무 커서 헐렁하지 않아 몸에 잘 맞는 브레통 셔츠로 인문학적 멋내기를 해보기를 권한다.
Pablo Picasso shot by Robert Doisneau, circa 1952.